• <이슴만 포럼 62회 발표문>       
          이승만 박사와 4.19와 나

                                  이 영 일 (4.19당시 서울대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3년생) 
  • 건국이념보급회가 매달 개최하는 <이승만 포럼>은 제62회를 맞는 4월19일이 4.19의거 56주년이므로 당시 주역 학생지도자였던 이영일 전 국회의원을 발표자로 선정, 4.19의 재평가를 들었다.
    ▲ 건국이념보급회가 매달 개최하는 <이승만 포럼>은 제62회를 맞는 4월19일이 4.19의거 56주년이므로 당시 주역 학생지도자였던 이영일 전 국회의원을 발표자로 선정, 4.19의 재평가를 들었다.
    1. 들어가면서  
     
     이승만 포럼 측에서 저에게 준 논제가 “이승만 박사, 4.19와 나”라는 매우 특이한 제목이다. 4.19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이승만 박사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를 묻는 제목으로 이해한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 평가는 평가자가 가지고 있거나 축적하고 있는 당해 사건이나 인물에 관한 지식이나 정보, 평가자가 지향하는 이념적 성향, 평가하는 시기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특히 이승만 박사는 그의 90년의 생애가 한국 현대사와 궤를 같이하기 때문에 그분의 영향력 범위 안에 있던 사람들의 여러 가지 이해관계(정치적, 이념적, 사회경제적)에 따라 호오포폄(好惡褒貶)이 극에서 극으로 갈린다. 
     그간  이승만 박사에 관해서는 최근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라는 한국 사회의 새로운 문제의식이 등장하고 재평가의 업적이 저서나 자료출판을 통해 활성화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이승만 대통령을 부정하거나 매도하는 이른바 ‘이승만 죽이기’가 우리 사회의 일반적 흐름이었다. 이러한 흐름에 연(沿)하여 가능한 한 이승만 박사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지 않는, 시쳇말로 “말을 아끼는 추세”가 이승만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였던 것 같다. 
     
     최근에 들어와서 우리 지식인 사회는 대한민국의 국가로서의 위상이 제고되고 남북한 발전경쟁에서 한국의 우위가 실증되는 것과 때를 같이해서 초대대통령으로서 ‘이승만 대통령의 위상’을 새롭게 조명하려는 분위기가 싹튼 것 같다. 이러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이승만 죽이기‘의 목소리보다는 ’이승만 살리기‘의 목소리가 다소 커지고 정치학자들 간에 이승만을 다시 보는 연구업적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제가 과문(寡聞)하거나 불민(不敏)한 탓도 있었지만 오늘 같은 포럼이 거의 매월 한 차례씩 지닌 6년간 지속되어왔다는 사실을 저는 이번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정상적인 국가 같으면 60년대 후반부터 등장했어야 할 이승만 연구나 포럼이 80년대에 겨우 싹트고 이승만 포럼도 21세기에 들어와서 겨우 월례행사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현주소인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 작업이 한국사 전문학자들이 중심이 되는 것만으로는 공정성과 객관성을 기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우리 역사학자들의 역사연구범위는 가능한 한 조선사 연구로 시종되었으면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독립운동사까지 연장할 수는 있겠지만 해방 전후사나 대한민국의 수립과 발전과정의 연구 분석, 평가는 정치학이나 국제정치학, 비교정치학 전문가들에게 우선적으로 맡겨야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역사학자들은 대개 일국사(一國史)적 안목이나 도덕적 기준에서 사물을 관찰하기 쉽고 법통이나 치적평가를 선악을 중심으로 보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정치학이나 국제정치학(외교사 포함), 비교정치학은 한국과 같은 신생국이 Nation Building 과정에서 직면하는 내외의 도전을 비교, 분석하면서 상황의 의미를 객관화하는 방법론에 의지하기 때문에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 평가에서 현실성과 객관성을 가질 수 있다. 이점에서 작금에 거론되는 한국현대사 교과서의 집필 주체도 한국사 전문가들에게만 맡기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본다. 오히려 정치학과 비교정치학자들이 더 큰 역할을 맡는 것이 옳은 것 같다. 
     
     이와 관련해서 유념해야 할 것은 이승만 살리기가 이승만 죽이기의 재판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승만을 긍정하고 추앙하고 숭배할 자료만을 수집하고 이러한 평가를 토대로 한국의 현대사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상당한 반론에 직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승만 죽이기가 이승만의 철저한 부정에만 치중했기 때문에 이승만 살리기의 필요성을 자극한 것처럼 이승만 살리기도 지나친 과찬이나 추앙(推仰)만으로 흘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정치지도자는 누구나 공(功)과 과(過)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지적하여 후세에 귀감을 삼도록 해야 할 것이다. 특히 21세기 한국의 오늘을 사는 우리 국민들은 대한민국의 탄생과 존속과 발전의 기초를 역사 속에서 되돌아본다면 이승만 대통령의 지도력과 예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난 수년 동안 우리 사회는 이승만 대통령의 90평생의 어느 한 시기만을 떼어내어 그분의 과오를 들추어 욕하거나 부인해왔지만 마음 한 구석이 항상 편치 못한 것은 그 분이 우리 Nation Building에 끼친 엄청난 기여 때문이다. 지금 국민들의 상당수는 우리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을 이렇게 홀대, 폄하하는 것이 결코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느끼고 있을 것이다.(특수한 신념을 가진 소수자나 종북 패거리들은 예외) 
     
     영국의 정치학자 Bernard Click은 정치를 멋있게 정의했다. 즉, 한 나라의 정치공동체의 존속과 발전에 기여한 정도에 비례해서 거기에 상응한 몫을 나누는 과정이 정치라고.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에 기여한 몫을 공헌으로서 제대로 평가해주고 동시에 과오를 지적하는 것이  지금 우리 후대들에게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과 문제의식에서 “이승만 박사와 4.19와 나와의 관계”를 살피기로 한다.

    2. 나의 청소년 시절과 이승만 

     나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추억을 감히 인문학적 표현을 빌려 “나와 이승만의 만남”이라고 한다면 건방진 태도일까. 이승만 대통령은 해방 다음해인 1946년 9월 필자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부모님들에게서 훌륭한 독립 운동가, 나라의 큰 지도자로 들었다. 초등 3학년 때인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그 때부터 대학교 3학년 되던 1960년까지 대통령은 오로지 이승만 한 분뿐이었다. 그 시절 이승만은 나뿐만아니라 국민 모두에게 대통령의 동의어로 받아들여졌다. 
     나의 삶속에서 이승만대통령과 맨 처음 연관된 일은 광주서중 2학년 때인 1954년 6월에 일어났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제막식에 이승만 대통령이 나의 모교인 광주서중을 방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관행으로는 대통령의 지역방문 시 학생들이 시민들과 함께 출영하는데 이때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다는 광주서중과 전남여중생들이 출영을 맡았다. 제 어머니는 “나라님” 출영을 나간다고 하여 잘 다려놓은 교복을 내줘서 입었던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다. 광주에서 14Km 가량 떨어진 송정리비행장까지 부슬비를 맞으면서 도보로 행진, 출영을 나갔지만 기상사정으로 대통령의 광주방문은 취소되었다. 이날 학생들은 먼 길을 비 맞으면서 되돌아왔지만 누구하나 불평불만을 내뱉지 않았다. 먼발치로라도 이승만 박사를 한번 못 본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을 뿐이다. 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카리스마의 극치였다. 학생 탑 건립위원회는 이승만대통령에게 ‘학생운동기념탑’이라는 휘호 써주기를 청했는데 대통령은 원안(原案)에 독립이라는 두 글자를 첨가 “光州學生獨立運動紀念塔”이라는 휘호를 내려주었다. 이 대통령은 휘호를 주는 자리에서 "1919년 3.1운동으로 점화된 독립운동의 열기가 10년을 경과하면서 자칫 시들해질 수 있는 바로 그 때인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부르고 나옴으로써 독립운동의 열기가 제고되었다“고 회고하고 해외에서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큰 용기와 희망을 준 사건이었다고 술회했다는 것이다. 
     
     1955년 광주일고에 진학하면서부터는 중학교 다닐 때 영문도 모르고 선배들과 함께 휴전을 반대하는 관제시위에 동원되어 참가했던 시절과는 달리 내 또래 친구들 간에도 정치의식이 조금씩 싹트면서 시국이야기를 곧잘 나누었다. 특히 동아일보의 사설을 매일 읽고나오는 친구 한 사람이 화제를 독점하면서 국내정치를 소재로 매일 쉬는 시간마다 토론했다. 나도 이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신문사설을 열심히 읽었다. 이승만 박사이야기보다는 민주당의 신익희 씨나  조병옥 박사 이야기에 관심이 쏠렸으며 특히 4사5입 개헌이야기는 우리 학생들에게도 큰 흥밋거리였다. 136표면 가결될 자유당의 개헌안이 자유당의 이용범의원이 잘못투표함으로써 135표로 1표 부족사태가 발생, 개헌안이 부결되었는데 이를 4사5입으로 처리, 개헌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용범의원은 저와 같은 함평이씨(咸平李氏)였는데 그는 입구(口)자가 있는 투표지에 O표를 하라는 원내총무의 지시를 받고 투표용지를 받아 보니 옳을 가(可)자에도 口자가 있고 아니 부(否)자에도 口자가 있어 두 쪽 모두에게 O표를 한 것이 투표를 무효로 만든 원인이었다. 그 정도로 무식한 수준의 의원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자유당에 대한 국민적 혐오를 유발하는 것이었다. 자유당을 싫어하고 반대하는 심리가 내심에 쌓이기 시작했다.

    3. 나의 대학시절

    1958년 일고를 졸업하고 저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 진학했다. 한 학기 등록금과 가정교사를 구할 때까지 버틸 2개월분 하숙비가 전 재산이었다. 전형적인 흑 수저였는데 그 당시는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학생들 거의 대부분이 흑 수저였고 어느 면에서 전 국민 모두가 흑 수저나 다름없었다. 이 때도 6.25의 전재복구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있다가 친척집 아들을 가르치기로 하여 숙식문제는 해결되었고 성적이 오를 경우 등록금 보조도 약속받았다. 입학식이 끝난 후 광주에서 다니던 교회목사의 소개로 장충단에 있는 서울 경동교회에 대학생으로 등록을 하고 동대문 시장의 헌 책 방을 뒤지면서 대학 내에서 진보적인 체 할 수 있는 책 몇 권을 헐값에 샀다. 유물사관으로 역사를 보는 세계사 교정 5권, 전석담의 조선경제사, 백남훈의 조선 봉건사회경제사, 반 듀링 론 등 학내에서 진보를 앞세우면서 좀 유식한 체 하는 친구들과 입씨름할 책을 구입하여 탐독했다. 내 인생이 요즈음 말로 표현하면 운동권으로 변하는 과정이었다. 이런 책의 내용을 놓고 날 새가면서 토론했고 책에 담긴 내용을 한국현실에 대입하면서 한국사의 현 단계를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단계로 규정하고 경제적으로는 미 제국주의에 예속된 매판자본에 의해 한국경제가 수탈되고 있다고 분개했다. 특히 집권당인 자유당은 이승만이 친일파숙정을 외면하고 그들과 제휴했기 때문에  친일 관료배들이 국권을 농단한다고 진단했다. 
     이런 지적 분위기속에서 나는 학내 정치학과가 중심이 된 사회민주주의 연구 서클인 신진회에 가입하여 선배들과의 토론에 참여하였다. 신진회는 류근일 사건 등으로 유명했고 정치학과 선후배들의 주류서클이어서 참여하게 된 것 자체가 매우 자랑스러웠다. 그 당시는 활동보다는 연구와 토론이 주제였기 때문에 Lenin의 Imperialism이나 Rudolf Hilferding의 Financial Capitalism을 원서로 구입 영어공부 겸 지식습득의 수단으로 연구하고 토론시간에 연구결과를 발표하면서 토론을 이어감으로써 비판적 사회과학을 나름대로 학습하였다.      
     
    이런 와중에 사회민주주의자로 알려진 조봉암 선생이 공산간첩으로 몰려 사형당하고 경향신문이 폐간되고 국가보안법이 개악되어 인심혹란죄(人心惑亂罪) 같은 항목이 설치되는 등 적어도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민주역행현상이 줄이어 일어났다. 우리 학생들은 이 모든 것이 이승만의 결심 하에 진행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민주공화국을 만들어놓고도 정부 스스로가 헌법을 유린하고 갈수록 강권독재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고 단정했다. 이승만이 말하는 민주주의와 한국의 현실은 너무 유리되었다. 학교에서 배운 민주주의와 우리가 현실에서 목도하는 민주주의는 너무나 달랐다. 자유당 정권에 대한 미움에서 민주당에 대한 선호가 지식인 사회는 물론이거니와 시골이 아닌 도시에서는 갈수록 팽배했다. 여촌야도(與村野都)는 당시 선거의 일반적 흐름이었다. 이에 당황한 자유당은 지방자치법을 개정하여 6.25전쟁 기간 중에도 실시해왔던 지방자치단체장의 선거를 없애고 시장 군수 임명제를 실시하도록 법 개정을 마쳐 1960년에 실시될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대비했다. 

    그러나 정부통령 선거가 공고된 기간 중에 야당 대통령후보였던 조병옥 박사가 암으로 서거하는 바람에 이승만 대통령은 사실상 무투표당선이 확정되었고, 다만 미국과 달리 정부통령 런닝 메이트 제가 아닌 한국에서는 부통령을 국민직선으로 선출해야했다. 1956년에 실시된 제3대정부통령 선거 때는 대통령과 부통령의 당적이 달랐다. 야당의 장면(張勉)씨가 부통령에 당선되고 여당의 이기붕 씨가 낙선했는데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이러한 실패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자유당의 목표였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선호했던 이승만 대통령도 정부통령이 동일정당에서 나오는 것이 순리라는 입장을 누차 표명한 바 있었다. 장면부통령은 부통령에 당선된 지 1개월 만에 야당전당대회장소에서 저격 받았지만 목숨은 잃지 않았다. 

    4. 4월 혁명의 전개      

    이러한 상황에서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된 제4대 정부통령 선거는 사실상 부통령선거였지만 관권선거의 극치를 이루었다. 유권자의 정치적 의사표시를 철저히 왜곡하는 부정선거의 극치였다. 전 국민이 피부로 실감할 정도의 부정선거였다. 부정선거규탄의 함성이 전국각지에서 터져 나왔다. 이 과정에서 1960년 4월 11일 부정선거 규탄 데모를 하다가 사망한 김주열 군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앞바다에서 물위로 떠오르면서 국민적 분노는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국민들의 구호는 ‘이승만 정권타도’라기보다는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것이었다. 조봉암 씨는 사형 당했고 조병옥 박사도 병사하여 마땅한 야당의 대통령 후보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승만 퇴진을 요구하기보다는 우선 부정선거 규탄으로 국민들의 주장은 모아졌다. 
    그러나 데모가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경찰들의 데모진압이 강경해지면서 반정부시위는 변증법적 진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양이 축적되면 질적 변화를 가져온다는 질변율(質變律)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구호가 ‘독재정권 물러나라’로 바뀌기 시작했고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생들의 시위에 대한 자유당 깡패들의 테러가 알려지면서부터 드디어 전국 각 대학들은 4월 19일을 기하여 총궐기하게 되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새벽에 닭이 울듯이 전국 대학생들은 너나없이 반정부 시위에 떨쳐나선 것이다. 자유당 정권은 무력으로 시위진압을 시도, 180명의 시위대를 목숨을 앗아갔고 수 백 명의 학생들에게 부상을 입혔다. 국민들의 분노는 치솟았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계엄군은 데모진압에 나서지 않았고 한국군에 대한 직전지휘권을 가진 미군사령관과 당시 주한 미국대사 매카나기(Walter p. McConaughy)는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권고했다. 계엄군은 중립을 표방하면서 자유당 정권수호에 대한 충성을 포기했고 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지철회라는 압력 앞에서 이승만 박사는 하야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이승만 정권을 옹호하다가 자칫 한국 국민들이 반미로 태도를 바꿀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승만 박사의 하야를 촉구하고 하와이 망명길까지 신속히 마련해주었다.                
     당시 서울대학교는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과회장실을 본부로 하여 데모에 필요한 준비를 서둘렀다. 선언문은 몇몇 분이 초안을 마련했지만 최종적으로 채택된 것은 정치학과 3학년 이수정(지금은 고인이지만 문화공보부장관 역임)이 작성한 선언문이었다. 선언문의 요지는 한국 학생운동이 적색독재를 반대했던 것과 똑같은 논리의 연역에서 백색독재에 항거함을 자부한다면서 부정과 불의에 항거하기 위해 진리의 상아탑을 박차고 거리로 뛰쳐나왔다고 시위입장을 밝혔다. 4월 25일 “학생의 피에 보답하자”는 피켓을 든 교수단 데모에 이어 이승만의 하야성명이 발표되었다. 대통령 하야와 때를 같이하여 서울 시가지는 무규제의 극한적 혼란에 휩싸였다. 파출소는 불타고 경찰들은 근무지를 이탈, 모두 도망쳤기 때문에 경찰서들은 텅 빈 공간으로 방기되었다. 
    이때 학생운동은 두 패로 갈렸다. 학생들이 질서유지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온건파가 주류였다면 혁명의 가장 정상적 질서는 파괴와 혼란과 무질서이기 때문에 혁명화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제4계급으로서의 건달들이나 좌판상인들이나 껌팔이, 구두닦이들이 앞장서는 파괴활동은 더 지속되어야 한다는 좌파적 입장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비록 소수지만 등장했다. 필자는 두 주장이 모두 일리는 있지만 당시의 상황에서는 질서유지의 주체가 학생이 되어 파괴를 막아야한다는 견해를 지지했다. 결국 4.19 직후 사태는 온건 질서유지파들이 장악했고 계엄군도 여기에 협조하였다. 다행히도 북한공산당이 배후에서 주도했다고 인정할만한 공작이나 준비는 전무했던 것 같았다. 이 당시 파괴의 지속을 강조하던 친구들은 그 후 여러 형태의 친북좌경사건에 휘말리거나 사회활동에서 낙오되어 지금은 생사조차 알 길이 없다. 

    5. 4.19이후의 학생운동의 흐름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면서 우리 사회는 국가의 진로를 놓고 심각한 토론이 사회 각 분야에서 일어났다. 서울대학교의 경우 세 가지의 큰 흐름이 등장했다. 하나는 학생회가 중심이 되어 펼친 새 생활운동이었다. 관용차량의 사사로운 이용반대나 양담배 안 피우기 운동, 질서 지키기 운동, 공명선거추진운동 등 우리 사회의 일반적 비리를 척결하자는 것이다. 두 번째로 관심을 끈 움직임은 민족주의와 후진성극복을 목표로 하는 근대화연구 활동이었다. 문리대 사회학과나 서울상대 경제학과 등에서 주도하는 운동이었다. 
    셋째로는 7.29선거이후로 등장한 민족통일 운동이었다. 한국이 겪는 모든 어려움의 근원은 외세가 물고 온 분단이기 때문에 독재정권을 타파한 열정으로 민족의 발전을 저해하는 3.8선을 타파하는 통일운동이 이 시대를 바로 사는 청년운동의 길이라는 주장이 대학운동의 새롭고도 강렬한 흐름으로 등장했다.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운동의 결성이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에는 신진회나 후진사회연구회, 근대화 연구회 등이 모두 참여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 학생들에게 가장 자극적이었던 뉴스는 우주과학 분야에서 소련이 미국을 앞질러 Sputnik 발사에 성공했고 후루시초프가 유엔에서 미국을 상대로 평화공존을 제의하면서 전쟁하지 않고도 발전경쟁에서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이긴다고 큰 소리를 친 것이다. 여기에 주일본 미국대사인 마이크 맨스필드가 한국통일 모델로 오스트리아 식 중립화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발언한 것도 큰 자극제였다. 

    4.19 이후 정권을 잡은 민주당은 혁명의 주체세력들인 대학생들이 갈망하는 이상과 꿈에 걸 맞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던 학생들의 대다수는 자유당 정권이 정권연장에만 급급했을 뿐 국민들에게 필요한 국가발전의 꿈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었는데 이 점은 민주당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3선 개헌으로 장기집권의 길만 열었을 뿐 장기집권의 대가로서 국민들에게 꿈과 비전을 주지 못했다. 부흥부장관 송인상 씨 등이 중심이 되어 경제개발계획을 검토했다고는 하지만 이 계획이 정권의 중심 어젠다가 되지 못했고 국민들이 원하는 근대화의 비전으로 발전시키지도 못했다. 인사정책도 집권연장을 위한 친일관료정상배들을 선발, 권력의 주변에 포진시키고 정권안보를 위해 경찰들의 권력만 강화시켰다. 

    이승만 대통령은 개헌으로 3선의 길을 열고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당시 83세의 노인 대통령으로서는 경륜 있는 새 정치를 펼치기에는 육체적인 한계가 찾아왔던 것이다. 파레토(Vilfred Pareto)는 그의 유명한 권력순환이론에서 노쇠라는 육체적 몰락은 이념의 몰락을 수반하면서 필연적으로 엘리트 순환을 가져온다고 설파한 바 있다. Pareto의 권력순환이론이 이승만 박사에게 적중한 것이다. 이승만 박사는 집권기간이 늘어난 만큼 거기에 상응하는 대국민 서비스로서 근대화나 경제개발 같은 꿈을 제공하지 못했다. 북진통일이나 안보위기 조장만으로는 더 이상 국민들의 지지를 창조해 낼 수 없었다. 결국 무상독재(無償獨裁)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맞게 된 것이다. 이승만 정권 붕괴 후 아무런 준비 없이 정권을 장악한 민주당 역시 비록 단명으로 끝났지만 시대정신에 맞는 국민통합의 길을 제시하지 못했다. 4.19의 혁명에 국민들이 걸었던 기대는 모두 군사정권에게로 넘어갔다.  

     대한민국 체제는 북한의 수령정치처럼 우상화를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 자신의 생애나 업적을 기리고 평가할만한 자료를 권좌에 있을 때 만들어서 국민들에게 알릴 수 없었다. 때문에 그 분의 업적은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고 알 수도 없었다. 또 권좌에서 물러나 하와이로 망명한 후에는 ‘이승만 죽이기’라고 명명할만한 엄청난 모략과 비방이 쏟아짐으로 해서 이승만 박사가 83세 이전(1956년 이전)에 쌓은 엄청난 기여와 공로는 모두 사라지고 과오만 나열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4.19당시 젊은 학생들은 대통령으로서의 이승만 박사는 알지만 그분이 독립운동과 건국을 위해, 한국전쟁과 휴전과 한미방위 동맹을 위해 어떻게 기여했는가를 바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바로 이 무지의 공간을 파고든 것이 친북좌파들이었다. 이승만 박사 때문에 적화통일이 안된 것을 몹시 애통해했던 친북공산주의자들이 나서서 4.19이후의 혼란을 틈타 반 이승만 모략책동을 치밀하게 펼쳤다. 

    6. 이승만 박사에 대한 모략책동

    가. 소남한 단정론 비판
    4.19직후 민족통일연맹이 결성된 후 필자는 민통련의 선전위원장으로서 활약했는데 이 때 한국의 각지에 잠재되어있던 공산 분자들이 제철을 만난 듯 민족통일연맹운동에 날 파리 떼처럼 몰려들었다. 이들 중에는 민청학련사건에 관련되어 사형당한 사람도 끼여 있지만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이들이 맨 먼저 들고 나온 주장은 이승만의 건국노선을 소남한 단정노선(小南韓單政)이라고 맹공 하였다.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김구(金九) 선생 중심으로 통일되었어야 할 나라가 이승만이 미국과 짜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했기 때문에 통일이 안 되고 한반도에 두 개의 분단국가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매우 그럴듯한 소리였다. 이 주장이 허구였음을 내가 깨닫는데 반세기가 흘렀다. 4.19혁명 50주년 기념으로 기획된 미래정책연구소의 학술세미나에서 “4.19세대가 본 이승만 박사의 공과 과”를 주제로 발표논문을 준비하면서 놀랄만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첫째 소련이 점령지 북한 땅에 부동항을 확보할 목적으로 미소공동위원회의 결과와 관계없이 소련군 점령지인 북한에 위성정권을 세우도록 1945년 9월 20일 북한군 점령사령관 치스차코프에게 스탈린이 지령했다는 사실이었다. 
     
    둘째로 해방정국에서 민족지도자가운데 미국인 비서와 러시아인 비서를 대동한 사람은 이승만 박사뿐이었다는 사실이다. 미국과 소련의 움직임을 전혀 모르면서 민족의 진로를 모색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인데 이승만 대통령만 유일하게 미국인으로서는 로버트 올리버(R. Oliver)를, 러시아인으로서는 에밀 구베로(Emile Gouvereau)를 두고 정보를 획득했다는 사실이다. 북한에서 단독정부가 세워지고 인민군이 창설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군정당국은 아무 대책 없이 세월을 허송하면서 일제에서 해방된 한국 국민들의 주권회복을 기약 없이 천연시키고 있었다. 이 답답한 현실을 타개하기위해 이승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유엔감시하의 자유총선거로 한국민의 주권회복과 적법한 독립정부를 수립할 방도를 마련, 미 국무성에 제시함으로써 유엔방식에 의한 정부수립의 길을 열었다. 
     소련군 점령사령관의 지시로 만들어진 북한 정권은 한마디로 소련의 괴뢰정부, 위성정부였으나 한국은 유엔감시 자유총선거로 국회를 구성하고 정부를 수립한 후 유엔총회로부터 한반도에 유일한 적법정부로 승인받았기 때문에 국가수립의 정통성에 아무런 흠결이 없는 정통정부인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적법 정부의 출현을  소남한 단정으로 비방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곁들여 특히 놀라운 세 번째 발견은 이승만 박사가 1923년에 벌써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이란 논문을 써서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자기가 꿈꾸는 정부는 그가 1904년에 발표한 [독립정신]에서 주장한대로 자유민주주의 정부였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민족지도자가운데 여운형(呂運亨)은 중국대륙에서 공산주의 ABC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번역하는 등 공산주의에 심취한 반면 그 밖의 인사들은 아나키즘에 흐르기도 했고 아니면 이념문제에 대해 문외한이기 일쑤였다. 
    김구 선생이 추구한 이념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바 없지만 그분이 이승만 박사보다는 나이가 한 살 아래지만 학문적 배경이 과거(科擧)를 준비하던 유생이었던 점으로 보나 외교투쟁보다는 의혈투쟁(윤봉길 의사나 이봉창 열사가 추구했던 노선)을 주도한 점 등으로 미루어 공산당이나 공산주의에 대해 명확한 개념을 가졌는지는 의문이다. 특히 1948년의 김일성이 주도한 이른바 4김 회담이나 남북협상에서 드러난 김구 선생의 태도는 그분의 대공관이 매우 불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민족이익을 사상이익의 우위에 두고 분단 없는 통일을 추구하기위해 이승만의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반대할 수 있다는 주장도 성립될 수 있지만 당시 북한이 남한의 치안능력과는 비교도 안 될 인민군으로 무장이 완비된 상태임을 보고도 통일만을 추구했다면 공산화통일도 통일로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를 가진 분이라는 평가에서 자유롭기는 힘들 것이다.
     
    나. 부산정치파동과 양민학살문제 
    소남한 단정비판 이외에 이승만이 받는 다른 비판은 부산정치파동과 한강 폭파사건, 양민학살 사건 등이 있다. 그러나 부산정치파동은 6.25전쟁 중에 미국이 자기들 목적에 맞도록 한국전쟁을 끝맺기 위해 미국의 전쟁정책에 맞서는 이승만을 국회의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에서 끌어내기 위해 원내다수의석을 가진 한국 민주당을 꼬드기는 공작을 이승만이 미리 알아채고 군대를 동원, 국회를 겁박함으로써 미국의 책동을 저지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어느 면에서 이승만을 비판할 대목이 아니라 평가해야 할 대목이다. 한국통일을 바라는 한국민의 여망에 따라 전쟁정책이 수행되어야한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주장이 옳았기 때문이다. 미국에 놀아난 당시의 한민당의 열등성, 미국의 내정간섭적 태도는 이승만의 반민주적 행태에 못지않게 비난받아야할 것이다. 결국 이승만의 이러한 대미외교자세가 반공포로석방, 한미방위조약체결로 이어지는 외교의 성과를 올렸던 것이다. 이승만은 휴전 후 1953년 10월 미국을 방문했다. 이때 이승만은 도착성명에서 한국에서 목숨을 잃은 미군병사 3만2000명의 희생에 감사한다는 이야기 한마디 없이 “한국민들은 워싱턴의 겁쟁이들 때문에 통일을 상실했다고 분개했다”고 말했다.(당시 수행했던 김용식 전 통일부장관 회고) 이밖에 양민학살 문제나 한강 철도 폭파문제도 비난받아야 할 이유가 되지만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결심사항이라기보다는 군사작전상의 필요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큰 과오로 볼 수는 없다. 

    다. 친일파 숙정문제 
    끝으로 친일파 청산문제와 죽산 조봉암 선생에 대한 사법살인은 이승만 박사가 책임져야 할 과오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친일파문제에 대해서는 이승만 박사의 입장이 일반인들의 생각과는 다른 측면이 있었다. 그는 1945년 10월 임시정부요인환국기념만찬 석상에서 해외파와 국내파간에 친일문제를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지자 이승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선국왕이 총 한방 쏘지 않고 나라를 일본에 합병시킴으로써 2천만 조선민중이 친일하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만들었는데 조선국왕에게 물어야할 책임을 그간 국내외에서 일제 때문에 고생하면서 살아온 사람들 끼리 친일이냐 반일이냐를 따지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지금은 합심하여 나라를 세우는 일에 힘을 모아야 한다”고 호소했다는 것이다.(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논리적으로는 옳은 말이지만 국회가 의결한 반민족행위처벌에 관한 법에 따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차원에서 시범적 처벌을 단행해야 했는데 그것을 차일피일 하다가 6.25동란을 당하여 친일파응징은 손도 못 대었고 휴전 후에는 오히려 친일 했던 사람들을 반공기술자들이라고 하여 정부요직에 기용하고 오히려 독립운동가탄압에 앞장섰던 자들이 득세하는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7. 끝마치면서

    이승만 박사는 그의 생애를 조국의 독립과 발전에 헌신한 위대한 선각자요 민족의 큰 지도자였다. 한국처럼 지도자 복 없는 나라에 하늘이 준 큰 인물이었다. 그분으로 인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이 탄생했고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해방당시 우리나라는 민주정치가 뿌리내릴 여건이 거의 갖춰지지 않은 나라였다. 전체인구의 80%가 문맹이었다. GDP의 통계가 잡히지 않을 만큼 빈곤한 나라로서 민주주의가 발전할 경제적 기초가 원천적으로 결여된 나라였다. 여기에 분단국가로서 건국초기부터 남북한 간에는 심각한 사상전이 이어졌고 급기야는 동족상잔의 비극마저 겪어야 했다. 그러나 전쟁의 끝나면서부터 이승만은 문맹을 퇴치했고 국민의무교육제와 지방자치를 실시함으로 해서 대한민국국민들을 국민으로서 정체성을 갖도록 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미군이 주둔하는 밀착방어체제를 갖춤으로써 국가의 안보기반도 공고히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인생 70세에 귀국, 나라를 세우고 전쟁에서 국가를 방위하고 대한민국을 국가다운 국가로 기틀을 세우는데 12년의 세월을 바쳤다. 1954년 4사5입 개헌을 통하여 장기집권의 길을 열지 않았더라면 그 분은 우리나라의 국부로서 국내외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3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던 1954년에 이미 80세의 고령이었다. 육체적으로 더 이상 정상적인 정무와 국사를 감당할 수 없는 시점에 왔던 것이다. 그는 마땅한 후계자를 찾지 못한 가운데 장기집권을 꾀하다가 수많은 젊은 학생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가운데 혁명의 객체가 되는 과오를 범했다. 
     중국의 모택동도 이승만과 같은 어려운 지경에 처했었다. 그는 문화대혁명이라는 10년 대란을 일으켜 전 중국을 폐허로 만들고 수천만의 동포를 굶어죽이거나 테러로 죽이는 엄청난 과오를 범했다. 양과 질적으로는 이승만과 비교도 안될 만큼 크고 무서운 과오를 범했다. 그러나 오늘날 모택동은 중국베이징의 천안문위에 그의 초상이 항상 걸려있고 중국공산당 만세와 함께 모택동 만세가 대형 현수막으로 걸려있다. 천안문에서 마주 보이는 쪽에는 그의 기념관이 있다. 중국공산당은 1981년 6월 역사에 관한 중요결의를 통해 모택동의 공은 7이요 과는 3으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중국공산당 역사를 공부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모택동은 과오가 7, 공을 3정도로 봐준다면 후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등소평이 모택동의 공과 과를 7대 3으로 결정한 것은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정권이 계속집권할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문화대혁명의 책임을 물어 모택동을 단죄한다면 중국공산당은 더 이상 집권할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택동을 의도적으로 공 7, 과 3으로 살려야 중국공산당이 산다는 것을 등소평이 알았기 때문이다. 이승만 박사도 그 분의 삶을 총체적으로 평가한다면 공을 7로, 과를 3으로 점수를 매겨도 결코 잘못된 평가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에게는 그를 죽이기에 나설 사람들은 많았어도 살리기에 나설 사람은 정치세력가운데는 없었다. 이승만을 지지했던 자유당은 해체되었고 부정선거 원흉으로 처벌받거나 부정축재자로 몰려 단죄되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박사는 고국에서 삶을 마치기 위해 귀국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청했지만 국민여론이 두려워 귀국 허가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이승만 박사의 귀국을 주선하고 필요한 경비도 지원했음을 김종필은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지만 그때는 이미 환국의 의미가 없을 만큼 건강이 악화된 시점이었다. 그를 공정하게 평가할 자료도 정비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은 국민들의 마음속에 존경받는 존재로 남아있었다. 필자의 체험담 하나를 이 기회에 소개한다. 1965년 7월 21일경 이승만 박사의 시신이 서울로 돌아와 국립묘지에 가족장으로 묻힐 때 전국각지에서 그분 시신의 환국을 지켜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상경했고 도로연변에는 시민들이 도열, 애도하고 있었다. 이때 4.19에 앞장섰던 필자와 더불어 제 친구들이 모여 하와이로 망명한 이승만 유해의 귀국을 반대한다는 시위를 벌였다. 이때 저희들에게 동조하거나 호응하는 시민들은 거의 없었고 오히려 우리들에게 눈살을 찌프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결국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다가 도로교통법위반으로 걸려 남대문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훈방당한 일이 있었다. 일반시민들은 이승만 대통령은 훌륭한데 그분이 인의 장막에 싸여 민심을 몰랐다거나 자유당 강경파 관료세력들 때문에 말년이 잘못되었다고 평가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1980년대의 시작과 더불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가 학계에서 시도되고 그분의 건국과 관련된 업적이 제대로 알려지고 밝혀지면서, 특히 한미방위조약체결로 휴전 60년 동안 부분적인 남북충돌은 있었지만 동족상잔의 큰 전쟁 없이 경제발전을 이룩할 여건을 만든 이승만 박사의 기여가 새롭게 조명된 것은 매우 다행스럽다. 현재까지 나타난 업적평가의 실적은 아직 미약하다. 그러나 초대대통령으로서 이승만 박사의 공로를 그 적정형태에서 평가하고 국민들이 기억하도록 해주는 일은 민족의 긴 미래를 내다볼 때 서둘러야 할 일이다. 우리 후대들이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회고할 민족의 큰 지도자의 반열에 이승만 대통령을 올리는 작업이 오늘 이 포럼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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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일(李榮一) 주요학력 및 경력

                           학         력

    *광주일고(1955-58) 및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정치학과 졸업(1958-64)
    *동국대학교행정대학원 수료(1968)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발전정책연구과정 1기수료(1972)
    *日本 츠쿠바(筑波)대학 외국인연구원(1988-90)


                            경         력
    1.정치경력
    *제11,12,15대국회의원(통일 외교 통상위원 및 국회 문교공보위원)
    *제12대 국회 국회문교공보위원장(1987-89)

    2. 頂上外交 참여
    *한미정상회담(전두환 대통령-레이건대통령)수행(1985)
    *유럽4개국(영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정상회담수행(1986)
    *한중정상회담(金大中대통령-장쩌민주석) 수행(1998)
    *한중정상회담(박근혜대통령-시진핑 주석)수행(2013)

    3.국토통일원 근무(1970-1980) 
    *통일연수원장(1급) *교육홍보실장(1급)
    *정치외교정책담당관(2급)

    4. 사회활동경력
    한민족복지재단 공동대표로 6회 북한방문 (2001-2006)
    한중문화협회 총재(1998-2014 )
    한중정치외교포럼회장(2014~   )

    5. 상훈
    *홍조근정훈장 수상(1979)
    *벨기에정부 대십자수교훈장(1986)
    *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드 외국어 대학 명예정치학박사
    *광주 호남대학교 명예법학박사

    5.주요저서
    *분단시대의 통일문제(1981)
    *햇볕정책의 종언(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