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교과서의 난폭한 서술

    전장에서 잠시 언급하였습니다만, 연합군에 의한 해방은 우리 민족이 원하는 방향으로 국가를 건설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는 역사교과서의 서술을 비판하는 것으로 이 장을 시작하겠습니다. 문제의 금성사판 교과서를 좀 더 읽어 가면 같은 맥락의 다음과 같은 기술이 나옵니다. “일장기가 걸려 있던 그 자리에 펄럭이는 것은 이제 성조기였다. 광복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역사적 순간은 자주 독립을 위한 시련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조선총독부에 걸린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대신 걸린 것은 어김없는 사실입니다. 1945년 9월 9일의 일입니다. 그런데 교과서는 그것이 자주 독립을 위한 시련의 출발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연합군에 의한 해방이 장애가 되었다는 앞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여기서 좀더 명확히 드러납니다. 한마디로 미국 때문에 민족의 분단이 생겼다는 것이지요. 그 말을 노골적으로 하기 어려우니까 이렇게 말을 빙빙 돌리고 있을 뿐입니다.
    교과서를 쓴 사람들이나 교육부에서 검인정에 담당한 사람들이 해방전후사에 대해 어떠한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지는 이 대목에서 더 없이 명확히 드러납니다. 다름 아니라 제1장에서 정리한 《인식》의 역사관 그대로입니다. 한마디로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혁명 그것이지요. 해방 전후의 그 시대를 살면서 그 혁명을 위해 투쟁하신 분들을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소신대로 살다가 돌아가신 분들은 이미 지나간 역사입니다. 조용한 성찰의 대상일 뿐이지요. 문제는 살아 있는 사람들, 곧 교과서를 집필한 역사가들과 검인정에 종사한 대한민국의 책임이 있는 공직자들입니다. 그들에게 묻습니다. 대한민국의 지난 60년의 역사가 그렇게도 허망한 것이어서 아직도 마오의 신민주주의혁명에 집착하고 있느냐고 말입니다. 변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교과서에 대한 저의 해석과 비판이 틀렸다든가, 아니면 지난 60년간의 역사가 너무나 허망하여 여전히 마오의 혁명이론이 유효하다든가, 이도 저도 아니면 전후 세계를 이끌어 온 미국체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실수했다고 솔직히 사과하든가, 어느 쪽이든 분명한 대답을 듣고 싶군요.
     
    해방 공간의 사회 실태

    이제 조금 감정을 가라앉히고 민족 분단의 원인을 차분히 따져 보도록 합시다. 역사관의 문제를 배제하고 논리적으로만 이야기하더라도 위 교과서의 서술에는 다음과 같은 허점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해방 이전부터 우리 민족의 대다수가 합의한 ‘나라세우기’(state building)의 마스터플랜이 마련되어 있었다는 전제가 설정되어 있습니다만, 그것이 사실일 수가 없지요. 민족이란 것 자체가 설정되어 있습니다만, 그것이 사실일 수가 없지요. 민족이란 것 자체가 일제의 억압과 차별을 받는 가운데 한반도의 주민집단이 서서히 발견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저의 제2장에서의 주장을 생각하면 답이 간단하게 나옵니다.
    해방 직후 그 생성 중인 민족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채만식의 《역로》라는 소설이 재미있을 것 같아 소개합니다. 해방 몇 달 뒤에 채만식은 서울역에서 기차표를 사기 위해 세 시간이나 서 있었습니다. 창구 앞에서는 긴 행렬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암표 장사가 한창입니다. 기차표를 파는 역무원은 걸핏하면 거스름돈을 돌려주지 않습니다. 어느 중학생이 거스름돈을 떼이고 하는 말입니다. “아무튼 사람들의 질이 전보담 되려 떨어졌어. 걱정야.”
    혼잡한 열차 속에서 겨우 자리를 잡은 채만식의 주변에서 열띤 정치 토론의 장이 벌어집니다. ‘늙은 농민’은 이승만을, ‘잠바 청년’은 여운형을 지지합니다. 어느 ‘시골신사’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찬양합니다. 열띤 토론은 천안역에서 중단됩니다. 유리창을 깨고 쌀 보퉁이를 들이밀면서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기어오릅니다. 여기저기서 고함과 함께 싸움이 벌어집니다. 부산에서 천안까지 쌀을 구하러 온 어떤 사람은 영악한 농민들이 일본으로 쌀을 밀수출하고 있다고 성토합니다. 그렇게 채만식의 눈에 미친 세태는 어지럽고 어두웠습니다. “백성이 아직 어리구 철이 아니 나서 그런가”, 아니면 “나이가 너무 많아 늙어빠져서 노망 기운으루다 그러는 것인가.”
    해방 당시의 사회 실태와 관련해서는 《재인식》에 실린 전상인 교수의 논문, <해방공간의 사회사>가 유익합니다. 여기서는 민족이니 혁명이니 하는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생활이 관찰의 주요 대상입니다. 이름 없이 살다간 보통 사람들이라 해서 그들이 무기력하게 그 시대에 놓여졌다고 이야기해서는 곤란합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그 시대의 주체로서 그 시대를 치열하게 겪어내고 적극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차라리 그들은 《역로》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규탄하고 있듯이 더없이 영악했는지 모릅니다.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중요했던 것은 민족이니 계급이니 하는 거창한 정치 담론이 아니라 가족, 가문, 마을, 곧 그들의 전통적인 인간관계였습니다.
    전상인의 논문에 의하면 해방 직후는 의외로 평온하였습니다. 북한 지역에서는 사정이 달랐습니다만, 일본인에 대한 조직적인 공격은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사회는 조금씩 문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전쟁 통에 억눌렸던 온갖 소비욕구가 분출하였습니다. 왕성한 쌀 소비가 대표적인 현상이지요. “쌀이 해방이야”, “쌀이 민족이야.” 그리고 애국가, 태극기, 3·1절 등과 같은 새로운 민족상징이 고안되고 널리 배포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군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지표들이었습니다. 전상인은 거론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미군의 위안부도 지표의 하나로 포함될 만하지요. 그런데 쌀이 일본으로 밀수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해방의 상징인 쌀이 부족해졌습니다. 여기저기서 매점매석이 벌어졌습니다. 미군정은 예상치 못한 사태에 당황하여 폐지했던 일제의 공출제도를 부활시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쌀을 강제수매 당하는 농민들이 불만입니다. 미군정이 일정보다 못하다는 무책임한 투정이 터져 나옵니다.

    소용돌이의 중앙정치

  • 신탁통치안을 찬성하는 좌파의 시위. ⓒ 뉴데일리
    ▲ 신탁통치안을 찬성하는 좌파의 시위. ⓒ 뉴데일리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만, 사람들은 가문과 촌락과 같은 전통적 사회관계에 익숙해 있었을 뿐입니다. 회사, 조합, 교회, 우애단체 등, 시민사회의 성립을 이야기할 수 있는 개인과 국가 간의 중간단체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국가는 강대했으며, 개인은 허약하였습니다. 국가와 개인 사이에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런 구조에서 중앙정치는 아무런 여과 없이 개인을 대량으로 동원하였습니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조차 걸핏하면 정치를 입에 담을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중앙정치의 과잉현상을 당시 미국대사관의 문정관으로 근무하던 그레고리 핸더슨(Gregory Henderson)이란 사람은 ‘소용돌이의 정치’(politics of vortex)라고 표현했습니다. 미국 남부의 평원을 가끔 엄습하여 집과 마을을 파괴하는 토네이도라는 거대한 회오리바람 있지 않습니까. 소용돌이란 그런 걸 말합니다. 핸더슨은 한국의 중앙정치가 발휘하는 거대한 흡인력을 그렇게 시니컬하게 비유하였지요.
    중앙정치는 이념을 달리하는 정파 간의 치열한 난투극이었습니다. 중앙의 난투극은 ‘소용돌이의 정치’를 통해 전국적 범위로 확장되었습니다. 저 산골의 필부조차 정치적으로 동원되고 상호 분열하였습니다. 왼쪽으로 동원된 사람들은 계급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공평하게 잘 산다는 사회주의의 미망(迷妄)을 추구하였습니다. 농촌사회에서 차별을 받던 하민들이 주로 그 쪽 편에 섰습니다.
    반면에 개인의 가치와 사유재산의 원리를 중시하는 상공업자, 신흥 테크노크라트, 농촌의 부민은 오른쪽에 가담하였습니다. 전통 유생들은 대개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을 모시는 입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른쪽에 가담한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결속하는 명분은 민족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민족은 오늘날과 달리 우파 자유진영의 정치적 자산이었지요.
    그렇지만 좌와 우의 구분이 그렇게 명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생소하기는 마찬가지인 계급이니 민족이니 하는 명분에 이끌려 영문도 잘 알지 못한 채 대립하고 분열하였습니다. 제가 방문한 적이 있는 충남 논산군 성동면의 어느 마을에서는 엉뚱하게 지주 가문이 좌익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지배를 받던 마을의 하민들이 우익에 가담하였습니다. 경북 예천군 보문면의 어느 마을에 가보니 거기서는 윤씨 친족집단과 정씨 친족집단이 대립하였는데, 윤씨가 왼쪽으로 가자 정씨는 무조건 오른쪽으로 갔습니다. 명실상부하게 ‘우리 민족’이라 할 만한 공동체의식과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단합이 성립해 있었더라면 어찌 그런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자율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사회들’(societies)이 넉넉히 성립해 있었더라면 어찌 바깥에서 배를 타고 들어온 계급이니 민족이니 하는 수입 담론으로 인간들이 그렇게 대립하고 분열할 수 있었겠습니까.
    서로 얼굴을 빤히 아는 농촌사회마저 그러하였기에 익명의 인간들이 대립한 중앙정치가 더욱 그러했음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서로 다른 이념의 정치가들이 허심탄회하게 약간씩 양보하면서 민족의 분단만큼은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다짐을 놓은 적은 없었습니다. 언젠가 저는 미군정의 지원하에 여운형과 김규식 선생을 중심으로 전개된 좌우합작운동을 알고 싶어서 관련 연구서를 정독한 적이 있습니다만, 적잖게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좌우합작운동이라고 하나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이 했던 것처럼 공개적인 협약과 실천으로서 합작은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합작을 위한 명분과 설득이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설왕설래했을 뿐입니다. 그를 위해 서울의 이름 있는 정치가들이 한자리에 모인 적은 없었거니와 그 때문에 평양의 정치가들이 서울에 온 적은 소문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좌우합작운동’이란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신 ‘좌우합작시도’ 정도가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분단의 선구는 어느 쪽에서?

    이상과 같이 분단을 초래한 일차적인 조건은 사회 자체가 분열되어 있었다는 의미에서 내재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만 이야기를 끝내서는 곤란합니다. 해방정국을 규정한 외적인 국제조건도 중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그것은 우리의 의지 밖이었기 때문에 보다 결정적인 제약조건이었습니다. 점령군으로서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에 진주한 미국과 소련이 협력할 여지는 처음부터 적었습니다. 처음 1년간은 그런대로 두 강대국 사이에 타협의 여지가 있어 보였습니다만, 동서냉전이 서서히 달구어지면서 협력의 가능성은 점차 봉쇄되어 갔습니다. 그 두 강대국을 제어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분단은 당시 한반도의 주민집단에게는 어쩌면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남한과 북한에서는 점령군에 의해 선택되고 지원되는 정치세력이 있었습니다. 남한에서는 일제하에서 근대 문명을 학습한 하급 관료와 테크노크라트형 지식인, 중소 상공업자들이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반면에 북한에서는 사회주의혁명을 추구한 지식인들이 중심 세력이었습니다. 어쨌든 지배적 정치세력이 점령군에 의해 선택되고 지원되었다는 점에서 남한과 북한 간에는 조금의 차이도 없었습니다.

  • 북한 주민들이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를 앞세운 채 행진하고 있다. ⓒ 뉴데일리
    ▲ 북한 주민들이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를 앞세운 채 행진하고 있다. ⓒ 뉴데일리

    흔히들 분단의 책임을 1946년 6월 3일, 후일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 전북 정읍에서 한 발언에 있다고 합니다만, 이것만큼 심한 중상모략도 없는 것 같습니다. 소련이 해체되고 난 뒤 비밀이 해제된 모스크바의 문서에 의하면 스탈린은 벌써 1945년 9월 20일에 북한의 소련군정에, 소련의 이해관계에 적합한 독자의 정부를 북한에 세우도록 비밀지령을 내렸습니다. 동 문서는 일본의 마이니찌[每日]신문의 기자가 발견하여 1993년 3월 26일자로 공개하였습니다. 스탈린의 비밀지령은 7개 항인데, 제2항이 해당 부분입니다. 그대로 인용하면 “북한에 반일적 민주주의 정당·조직의 광범위한 블록(연합)을 기초로 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확립 할 것”입니다. 말이 좀 어렵습니다만, 간단히 말해 사회주의 혁명을 단번에 실행하기는 힘드니까 공산당의 주도로 제1단계의 민주주의혁명을 추진하라는 뜻입니다. 그에 대해선 이미 제1장에서 설명한 바가 있으니 참조해 주십시오. 이렇게 스탈린의 북한정책은 처음부터 확고하였습니다. 그는 사회주의 제국에서는 누구도 그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는 황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황제의 지엄한 명령으로 한반도 북쪽의 정치적 운명은 1945년 9월 그때부터 이미 결판이 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스크바 문서를 토대로 한반도의 분단과정을 세밀히 고찰한 논문이 《재인식》에 실린 이정식 교수의 <냉전의 전개과정과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입니다. 이 논문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 1945년 9월 초까지도 스탈린의 한반도 정책은 유동적이었으며, 미국과 소련은 서로 타협할 여지가 있었다. 둘째, 타협의 가능성은 9월 12일부터 10월 2일 사이 런던에서 열렸던 미국·영국·프랑스·중국·소련의 전승국 외상회담에서 미국·영국과 소련이 노골적으로 충돌하면서 소멸하고 말았다. 셋째, 연후에 스탈린은 위와 같은 비밀지령을 북한의 소련 군정에 내려 북한에 독자 정부를 수립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넷째, 이후 스탈린의 한반도 정책은 일본과 중국의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데, 그가 한국전쟁을 도발하게 된 데는 중국의 공산화가 크게 작용하였다는 것입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북한에서는 이미 1946년부터 소련군과 그의 협력자들이 북한을 완벽하게 장악한 위에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등, 사실상 정부에 준하는 통치행위를 전개하였습니다. 그에 비하자면 남한의 미군정은 그의 협력자를 선택하는 데 무척이나 주저하였습니다. 미군정에 참여한 국무성의 진보주의자들은 낭만적이게도 좌파와의 협력 가능성에 매우 진지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실속이 없는 좌우합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노동운동과 관련해서도 비슷하게 지적할 수 있습니다. 《재인식》에 실린 박지향 교수의 논문, <한국의 노동운동과 미국>이 그에 관한 것입니다. 이 논문에 의하면 미군정의 진보주의자들은 중도 좌파는 물론, 합법적인 노조운동을 전개하는 한 공산당 계열의 전평[全評, 전국노동자평의회]조차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흔히들 미군정이 노동운동을 무조건 탄압하였다고 합니다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노동운동으로부터 정치세력을 분리하여 노동조합을 노동자의 진정한 대표기구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미군정의 그러한 시도는 전평이 극좌노선의 불법적인 투쟁을 감행함에 따라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윽고 1947년 3월 미국에서 동서냉전의 개시를 공식화한 트루만 독트린이 발표됩니다. 공산세력의 위협에 처해 있는 터키와 그리스에 미국이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선언한 것이지요. 이를 계기로 미군정의 진보주의자들이 추구한 모든 낭만적인 시도는 중단됩니다. 미국은 좌우합작을 처음부터 비판해 온 미운 오리와 같은 이승만을 협력자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미국은 이리 저리 모색하면서 끝까지 주저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시간을 들여 합의해서 결정할 수밖에 없는 자유민주주의의 속성상 그 점은 당연하다고까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는 처음부터 단호하게 김일성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지명하였던 소련의 스탈린과는 딴판이었습니다. 이쯤이면 분단의 국제정치적 책임이 어느 쪽에 있는지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천황제를 계승한 수령체제

    분단 과정의 북한 사정에 관해 좀 더 부연하겠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재인식》에 실린 키무라 미츠히코(大村光彦) 교수의 <파시즘에서 공산주의로ㅡ북한 집산주의 경제정책의 연속성과 발전>과 신형기 교수의 <신인간ㅡ해방 직후 북한 문학이 그려낸 동원의 형상>이 정말 좋은 논문들입니다. 키무라 교수의 논문은 북한의 경제체제가 일제의 전시경제체제를 그대로 계승한 것임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습니다. 앞서 소개하였습니다만, 일제는 전쟁수행을 위해 시장경제를 정지시키고 공출과 배급으로 상징되는 전시경제체제를 구축합니다. 이 통제경제는 해방 후 남한에서는 곧바로 폐지되어 시장경제가 부활하지만, 북한에서는 이름만 바꾼채 더 강화된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예컨대 공출(供出)이라는 강제수매제는 성출(誠出)로 이름이 바뀝니다만, 내용을 보면 값도 치르지 않고 거두어 가는 경우가 많고 쌀 이외의 다른 작물에까지 그 대상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일제가 시행한 마을단위의 생산책 임제는 증산돌격대로 이름이 바뀌지요. 공업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해방 후 북한의 이 같은 실상을 명확히 하면서 키무라 교수는 과연 북한 민중에게 ‘해방’이란 것이 있기나 했던가 라고 묻고 있습니다. 너무 당돌한 질문이라 처음에는 좀 어리벙벙했습니다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의 질문이 촌철살인(寸鐵殺人)입니다. 그렇지요. 민중의 일상적 경제생활에 대놓고 물어봅시다. 공출이나 성출이나 그게 그것이지요.
    다음은 신형기 교수의 논문입니다. 사회주의적 동원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일반 민중에게 ‘신인간’이란 이상적인 인간상이 제시되었습니다. 지주, 친일파, 이기주의, 개인주의, 이런 것들은 낡은 ‘구인간’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철저히 일반 민중으로부터 구획되고 배제되었습니다. 그리고선 사회주의혁명이 요구하는 고된 노동을 감당할 만한 정신적 긴장의 새로운 인간상이 제시되었습니다. ‘신인간’의 상징은 항일 무장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영웅, 개선장군 김일성이었습니다. 결국 일제의 천황을 대신한 것은 다름 아닌 김일성이었습니다. 이 논문을 읽고 나서 김일성종합대학이 세워지는 것을 확인하니 1946년 7월이군요. 대략 그 즈음부터 대량의 ‘구인간’들이 남으로 향하기 시작합니다. 전쟁 전에 이미 100만의 행렬이었습니다. 북한 주민의 1/10이나 되는 큰 인구였습니다. 그보다 더 분단의 과정과 그 역사적 의의를 웅변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달리 어디에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