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인정 교과서에 녹아든 민중사학, 본질은 '마르크스주의 史學'
  • 현재 사용 중인 검인정 고교 한국사교과서. ⓒ MBN 캡처
    ▲ 현재 사용 중인 검인정 고교 한국사교과서. ⓒ MBN 캡처

    [편집자 주]

    정부가 중학교 역사 및 고교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 전환 방침을 밝히면서 이른바 '역사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을 비롯한 야당과, 전교조 및 친전교조 성향의 학부모단체, 수정주의 민중사관이 장악한 국사학계는 정부의 방침을 '유신독재 시대로의 회귀'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아직 필진조차 구성되지 않은 국정 역사교과서에 대해 '친일 독재 미화'라는 낙인을 이미 찍었다.

    역사교과서가 국정이 되면, 친일과 독재를 미화할 것이란 이들의 주장은 근거가 전혀 없지만, 그 파급력은 매우 크다. 이미 상당수 국민들이 이들의 주장에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북한 전체주의를 '살기 좋은 복지 국가'로, 김일성을 '민족의 영웅'처럼 묘사하고 있는 현재의 검인정 한국사교과서들이 안고 있는 심각한 역사왜곡 실태는 일반 국민과 언론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다.

    이런 상황이 가능한 이유는 진보를 자처하지만 실제는 북한 전체주의를 추종하는 이들이, 현행 검인정 한국사교과서들의 역사왜곡을 철저하게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일반 국민들이 현행 검인정 한국사교과서의 비뚤어진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한다면, 국민들이 막연한 불안감에 야당과 국사학계의 주장에 휘둘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놓고 벌어지는 현재의 논란은, 속칭 진보를 자처하는 북한 전체주의 추종세력과 자유민주주의 보호 세력이 벌이는 사상-문화전쟁이다.

    자유를 훼손하는 자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민주주의는 보호받을 가치가 없으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확한 사실의 전달이 중요하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질식시키려는, 전체주의 추종세력의 역사-사상왜곡과 거짓된 선전전에 맞서기 위해서는, 현행 검인정 한국사교과서의 실체를 국민들에게 바로 알리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다.

    이에 뉴데일리는 현행 검인정 한국사교과서가 어련 과정을 거쳐 편향성을 띠게 됐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는 한 편의 논문을 소개한다.

    이 논문은 2년전 <한국사교과서 어떻게 편향되었나>라는 제목의 서적으로 출간된 상태다.

  • '한국사교과서 어떻게 편향되었나' 책 표지. ⓒ 비봉출판사 제공
    ▲ '한국사교과서 어떻게 편향되었나' 책 표지. ⓒ 비봉출판사 제공

    뉴데일리는 위 책의 저자인 정경희 영산대 교수와, 이책을 펴낸 비봉출판사(대표이사 박기봉)의 허락을 얻어, 위 책의 내용을 원문 그대로 연재한다.

    이 책은 현행 검인정 한국사교과서가 안고 있는 이념적 편향성의 뿌리를 규명하고 있다. 나아가 검인정 한국사교고서를 오염시킨 이념적 편향성의 근원이 친북-반대한민국적 민중사관이란 사실과, 민중사관이 어떻게 한국사교과서에 녹아들게 됐는지도 보여주고 있다.

    저자인 정경희 교수(영산대 자유전공학부)는 서울대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서양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다. 서울대와 서강대, 성균관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탐라대 교수, 미국 캘리포니아대(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 역사학과 객원교수, 아산정책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을 지냈다.

  • 정경희 영산대 교수. ⓒ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정경희 영산대 교수. ⓒ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정경희 교수는 처음 <미국을 만든 사람들>, <中道의 정치: 미국 헌법 제정사> 등의 저서 및 논문을 통해, 주로 미국사 연구에 주력했다.

    그러나 정경희 교수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우리나라 중고교 역사교육의 문제점을 절감하게 됐다. 대학생들을 통해 우리의 역사교육이 얼마나 심각하게 편향됐는지를 깨달은 정경희 교수는 이후 역사교과서에 관심을 가졌다.

    정경희 교수가 쓴 역사교육 관련 논문으로는 <미국 역사표준서 논쟁 연구>(《역사교육》 제89집, 2004년 3월), <역사교육을 둘러싼 한국과 미국의 이념논쟁 비교>(《미국학논집》 제40집 3호, 2008년 겨울), <세계사 교과서 속의 미국: 제7차 교육과정 세계사 교과서를 중심으로>(《역사교육》 제114집, 2010년 6월) 등이 있다.

    정경희 교수가 2013년 집필한, <한국사교과서 어떻게 편향되었나>는 학술논문이면서 동시에 대중적 성격도 갖고 있다. 이 책은 역사교과서 연구에 천착해 온 정경희 교수가 일반국민들에게 선사하는 값진 성과물이다.

    이 책을 통해, 일반 국민과 독자들이 현행 검인정 한국사교과서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 바탕위에서 국정 역사교과서 논쟁을 균형잡힌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귀한 연구 결과물의 연재를 흔쾌히 허락해 주신 정경희 교수와 비봉출판사 박기봉 사장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 목 차 -

    머리말

    1장. <중·고등학교 국사교육 개선을 위한 기본 방향>(1969): 민족주의적 국사교육의 시작

    2장. 1970년대 국사교육의 강화: 민족주의적 국사교육의 조장

    3장. 상고사 논쟁과 국사 교과서 파동: 중진급 역사학자의 교과서 집필 기피

    4장. 제4차 교육과정에 따른 국사 교과서 개정(1982)

    5장. 제5차 준거안 작성(1987): 국사 교과서 편향의 시작

    6장. 민중사학의 대두

    7장. 민중사학자들의 국정제에 대한 비판(1988)과 대중용 국사 교과서의 발간

    8장. 제5차 국사 교과서의 서술 변화와 국사 교과서에 대한 계속적 비판

    9장. 준거안 파동(1994)

    10장.‘한국 근·현대사’과목의 신설과 제7차 준거안의 편향성

    11장. 민중사학자들의 국사 교과서에 대한 끝없는 비판(2001)

    12장.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편향성과 그로 인한 교과서 파동(2002~2008)

    13장. 한국사 교과서의 여전한 이념 편향성


    ※ 본 기사는 정경희 박사의 저서 <한국사교과서 어떻게 편향되었나> 가운데 일부를 전재한 것으로, 본지의 11월 3일자 기사 <⑤-1. ‘민중사학’의 등장>의 후속편입니다. 


    4. 민중사학 대두의 원인

    가. 한국 근현대사 연구자의 증가

    그렇다면 민중사학이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대두한 주된 요인은 무엇인가? 우선 젊은 학자들의 상당수가 근현대사, 특히 현대사 연구에 참가하기 시작하면서 연구풍토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민중사학자들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전반에 민중사학론을 제창한 주역들이 저술한 책들을 주로 읽으면서 대학시절을 보낸 세대이다.

    이들이 대학생이던 시절,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분단시대의 역사인식』과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 민족·민중주의 사관(史觀)에 입각해서 쓰인 현대사 책들이 널리 읽혔다.

  • 해방전후사의 인식. ⓒ 조선닷컴
    ▲ 해방전후사의 인식. ⓒ 조선닷컴

    1970년대 중반부터 분단 극복을 화두로 삼아 근현대사 연구와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민족협동전선, 좌우합작운동 등을 주로 연구하던 강만길은 1978년에 분단 극복을 위한 새로운 사론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창작과비평, 1978)을 통해 냉전 논리하에서의 분단 극복의 역사관을 제시하여 당대 지식인들에게 큰 공감을 샀다.

    이 책의 주된 문제의식은 국사학의 현재성이다.

    1945년 이후의 시대가 ‘분단시대’임을 철저히 인식하고, 그 사론도 식민사학극복론에서 분단체제극복론으로 옮기는 ‘분단시대 사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970년대 후반에 대학생이었던 사람들에게 이 책은 리영희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창작과비평, 1974), 백낙청의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창작과비평, 1978)과 더불어 사회·역사적 상상력의 “수원지”였다고 평가된다.

    그 수원지에서 흘러나온 ‘의식화’의 물결이 1980년대 후반에 폭발할 민중세(民衆勢)의 스펀지에 깊숙이 먹혀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고종석, 「책 이야기(20)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한겨레』, 1991.01.26. 10면.)

    『해방전후사의 인식』(송건호 외, 1979~1989)은 1945년 직후 해방공간이 한국 현대사에 미친 영향을 좌파·민족주의 관점에서 조명한 책으로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총6권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해방정국에 대한 연구의 출발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사 연구의 방향을 이끌 정도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대학가에서 ‘해전사’로 약칭되었던 이 책은 1980년대를 통해 대학가 필독서 가운데 하나였으며, 이른바 학생운동권 내부에서 한국 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한 교재로 이용되었다.(※ 박태균, 「한국 현대사 연구의 추이와 쟁점」,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편, 『한국사 연구 50년』, 혜안, 2005. pp.381-426, p.394.)

    이밖에 전 한양대 교수인 리영희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창작과비평, 1974), 『우상과 이성』(한길사, 1977), 『8억인과의 대화』(창작과비평, 1977) 등도, 비록 역사책은 아니지만, 이들의 역사 인식을 형성하는데 한 몫 했다.

  •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쓴 '8억인과의 대화'. ⓒ 주간조선
    ▲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쓴 '8억인과의 대화'. ⓒ 주간조선

    특히 『8억인과의 대화』에서 리영희는 마오쩌둥과 마오쩌둥이 주도한 문화대혁명(1966~1976)을 찬양했는데, 문화대혁명의 희생자가 수천만 명에 달하는 점을 고려하면 이 책이 당시 젊은이들의 역사 인식에 미친 해악은 매우 크다.

    이러한 대표적인 서적 이외에도 1982년 3월 정부의 이데올로기 금서 기준이 완화되면서 1983년 이후 수정주의적 입장에서 쓰인 한국 현대사 연구물이 국내 서점가에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유영익, 「수정주의와 한국 현대사 연구」, 유영익 편, 『수정주의와 한국 현대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8, pp.10-13.)

    한국민중사연구회, 『한국민중사 II』, 풀빛, 1986.
    역사문제연구소 편, 『한국 근현대 연구입문』, 역사비평사, 1988.
    정용욱 외, 『남북한 역사인식 비교강의』, 일송정, 1988.
    이재화, 『한국 근현대 민족해방운동사』, 백산서당, 1988.
    남현우, 『항일무장투쟁사』, 대동, 1988.
    한국 현대사연구회 엮음, 『알기 쉬운 한국현대정치사』, 공동체, 1988.
    역사문제연구소 해방3년사 연구모임, 『해방3년사 연구입문』, 까치, 1989.
    망원한국사연구실, 『한국근대 민중운동사』, 돌베개, 1989.
    이성광, 『민중의 역사(1)』, 열사람, 1989.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1) ․ (2)』, 돌베개, 1988-1989.
    김인수, 『민중사의 재발견』, 힘, 1989.
    해방3년사연구회, 『해방정국과 조선혁명론』, 대야출판사, 1989.
    고준서, 『북한현대사입문』, 함성, 1990.
    구로역사연구소, 『바로보는 우리역사(2)』, 거름, 1990.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연구반, 『한국 현대사(1) ․ (2)』, 풀빛, 1991.
    노민영, 『다시 보는 한국전쟁』, 한울, 1991.
    송광성, 『미군점령 4년사』, 한울, 1993.
    조성오, 『우리 역사 이야기(3): 8·15에서 6월 민주항쟁까지』, 돌베개, 1993.
    역사문제연구소 편, 『바로잡아야 할 우리 역사 37장면(1)』, 역사비평사, 1993.
    한국정치연구회 정치사분과 지음, 『한국 현대사 이야기 주머니(1)』, 녹두, 1993.
    박현채 엮음, 『청년을 위한 한국 현대사』, 소나무, 1994.
    역사학연구소, 『강좌 한국근현대사』, 풀빛, 1995.
    한국역사연구회 엮음, 『한국역사 입문(3) 근대·현대편』, 풀빛, 1996.

    대학교 내 학생 동아리 등을 통해서 이러한 서적들을 탐독하는 이른바 ‘의식화 과정’을 거쳐서 한국 사회의 현실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게 된 젊은이들은 현실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한국 근현대사에 자연스레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직접 한국사 연구에 뛰어들었다.

    19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한국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 움직임의 확산은 역사학 연구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역사학자 중 일단의 진보적인 연구자 집단이 현실 변혁과 민족·민주운동에 관심을 갖고 동참하게 된 것이다.(※ 임하영, 앞의 논문, p.60.)

    나아가 이들은 민주화 운동의 참여 과정에서 자신들의 연구 주제를 찾았고, 거기서 나온 연구 결과를 다시 민주화 운동의 이론을 뒷받침하는데 활용했다.(※ 이주영, 앞의 논문, p.150.)

    198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 운동이 거세지면서 한국사 연구자들의 관심은 구한말과 일제시기로부터 해방이후의 현대사 연구로 옮겨갔다.

    이들의 연구는 주로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미군정 시기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미군정 시기가 연구 초점이 되었던 것은 한편으로는 분단 문제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1980년의 광주민주항쟁 이후 한·미관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가면서 미국의 대한(對韓)정책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고양된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박태균, 앞의 논문, pp.384-385.)


    나. 북한학계 연구 성과의 남한 유입

    1980년대 후반부터 민중사학이 본격적으로 대두하게 된 또 하나의 요인은 북한학계의 연구 성과가 남한에 소개되었다는 사실이다.(※  임하영, 앞의 논문, p.60.)

    1987년 10월부터 ‘6·29 민주화 선언’의 후속 절차로 북한 원전 등의 도서에 대한 해금 조치가 시작되면서, 북한 관련 서적의 출판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북한의 역사서 원전을 비롯한 역사 관련 서적이 주를 이루었다.

    북한의 <력사연구소>에서 펴낸 역사서 원전 가운데 1980년대 말에 남한에서 출판된 대표적인 서적은 다음과 같다.

  • 북한의 역사서가 이때 처음으로 국내 국사학계에 유입된 것은 물론 아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1987년 10월에 해금 조치가 이루어지기 전부터 국사학계 일각에서는 주로 일본과 같은 제3국을 통해서 북한의 역사서적을 접하면서 북한 역사학자들의 역사 해석을 상당 부분 수용해왔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때 북한학계의 연구 성과가 본격적으로 남한에 유입되면서 남한 학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자신들의 업적을 재검토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진보적인 성향을 띤 젊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이전 시기 연구 성과에 대한 비판과 계승, 당시 사회경제적 조건에 대한 문제의식 등이 ‘민중사학론’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임하영, 앞의 논문, pp.60-61.)

    그런 의미에서 민중사학은 마르크스주의 사학과 민족주의 사학이 접목되어 나타난 것으로 설명된다.

  • 북한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가 펴낸 ‘현대조선력사’ 표지. ⓒ 조선닷컴
    ▲ 북한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가 펴낸 ‘현대조선력사’ 표지. ⓒ 조선닷컴

    식민주의 지배의 긴 터널을 벗어나자마자 맞이한 분단이라는 특수한 경험은 민족 문제에 대한 감수성을 날카롭게 만들었고, 그 결과 한국 마르크스주의 사학은 민족주의 사학과 접목되어 민중사학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중사학은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을 주요 모순과 기본 모순으로 설정하고, 그에 입각해서 한국 근·현대사에 접근한다. 민중사학의 문제의식은 민족이 곧 민중이고, 민중이 곧 민족이라는 것이다. 임지현, 『이념의 속살』, 삼인, 2001, pp.345-385.)

    정리하면, 민중사학은 북한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가 남한에 유입되면서 대두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일종인 것이다.


    다. 졸업정원제 실시에 따른 신진연구자들의 교수 대거 임용

    위의 두 가지 요인 외에도, 당시에 민중사학이 본격적으로 대두하게 된 또 하나의 요인으로 1980년대 초부터 시작된 사회 변화와 맞물려 이들 젊은 학자들이 대거 대학교수로 임용되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980년에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교육개혁 조치의 하나로 졸업정원제를 내놓았다. 졸업정원제가 시행되면서 1982년도 대학의 입학생 수가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다.

    갑작스런 학생 증원에 따라 대학들이 교수 부족 사태를 겪게 되면서, 1980년대 중후반에 이르기까지 교수 자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람들을 대거 대학교수로 임용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때에 임용된 사람들 가운데는 석사학위만을 취득하고 박사과정에 갓 입학했거나 또는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역사학계의 경우, 1970년대 초부터 한국사 연구를 반정부활동과 매한가지로 여기면서 대학원의 석사 또는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젊은이들의 상당수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대학의 교수로 임용되면서 학계에 안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1980년대 초에 갑작스레 시행된 졸업정원제 덕택에 역사 연구자로서의 소양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대학교수로 임용된 사람들이었다. 이는 그들이 대학교수로 임용된 이후의 행보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물론 이들 소장학자 가운데 묵묵히 학자로서의 길을 걸은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학교수로서의 기본 자격이나 자질을 갖추지 못했거나 반정부적, 반체제적 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교수로 임용된 후에도 교수 본연의 업무보다는 학문외적인 활동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순수한 학술단체라기보다는 현실 참여적 성향이 강한 학술단체를 조직해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1980년대 중후반에 이념 성향이 강한 역사 관련 연구소들이 출현하게 되는 배경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이들 소장학자들은 자신들과 이념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을 계속해서 같은 대학교 또는 학과의 교수로 임용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그 결과 시간이 흐르면서 국사학계의 좌편향 성향은 더욱 심해져갔다.(※ 이 주제에 관한 학술적인 연구는 아직 시작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1980년대 한국 사회사 및 교육사의 주요 사건으로, 장차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