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 사용 중인 검인정 고교 한국사교과서. ⓒ MBN 캡처
    ▲ 현재 사용 중인 검인정 고교 한국사교과서. ⓒ MBN 캡처

    [편집자 주]

    정부가 중학교 역사 및 고교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 전환 방침을 밝히면서 이른바 '역사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을 비롯한 야당과, 전교조 및 친전교조 성향의 학부모단체, 수정주의 민중사관이 장악한 국사학계는 정부의 방침을 '유신독재 시대로의 회귀'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아직 필진조차 구성되지 않은 국정 역사교과서에 대해 '친일 독재 미화'라는 낙인을 이미 찍었다.

    역사교과서가 국정이 되면, 친일과 독재를 미화할 것이란 이들의 주장은 근거가 전혀 없지만, 그 파급력은 매우 크다. 이미 상당수 국민들이 이들의 주장에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북한 전체주의를 '살기 좋은 복지 국가'로, 김일성을 '민족의 영웅'처럼 묘사하고 있는 현재의 검인정 한국사교과서들이 안고 있는 심각한 역사왜곡 실태는 일반 국민과 언론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다.

    이런 상황이 가능한 이유는 진보를 자처하지만 실제는 북한 전체주의를 추종하는 이들이, 현행 검인정 한국사교과서들의 역사왜곡을 철저하게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일반 국민들이 현행 검인정 한국사교과서의 비뚤어진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한다면, 국민들이 막연한 불안감에 야당과 국사학계의 주장에 휘둘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놓고 벌어지는 현재의 논란은, 속칭 진보를 자처하는 북한 전체주의 추종세력과 자유민주주의 보호 세력이 벌이는 사상-문화전쟁이다.

    자유를 훼손하는 자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민주주의는 보호받을 가치가 없으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확한 사실의 전달이 중요하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질식시키려는, 전체주의 추종세력의 역사-사상왜곡과 거짓된 선전전에 맞서기 위해서는, 현행 검인정 한국사교과서의 실체를 국민들에게 바로 알리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다.

    이에 뉴데일리는 현행 검인정 한국사교과서가 어련 과정을 거쳐 편향성을 띠게 됐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는 한 편의 논문을 소개한다.

    이 논문은 2년전 <한국사교과서 어떻게 편향되었나>라는 제목의 서적으로 출간된 상태다.

  • '한국사교과서 어떻게 편향되었나' 책 표지. ⓒ 비봉출판사 제공
    ▲ '한국사교과서 어떻게 편향되었나' 책 표지. ⓒ 비봉출판사 제공

    뉴데일리는 위 책의 저자인 정경희 영산대 교수와, 이책을 펴낸 비봉출판사(대표이사 박기봉)의 허락을 얻어, 위 책의 내용을 원문 그대로 연재한다.

    이 책은 현행 검인정 한국사교과서가 안고 있는 이념적 편향성의 뿌리를 규명하고 있다. 나아가 검인정 한국사교고서를 오염시킨 이념적 편향성의 근원이 친북-반대한민국적 민중사관이란 사실과, 민중사관이 어떻게 한국사교과서에 녹아들게 됐는지도 보여주고 있다.

    저자인 정경희 교수(영산대 자유전공학부)는 서울대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서양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다. 서울대와 서강대, 성균관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탐라대 교수, 미국 캘리포니아대(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 역사학과 객원교수, 아산정책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을 지냈다.

  • 정경희 영산대 교수. ⓒ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정경희 영산대 교수. ⓒ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정경희 교수는 처음 <미국을 만든 사람들>, <中道의 정치: 미국 헌법 제정사> 등의 저서 및 논문을 통해, 주로 미국사 연구에 주력했다.

    그러나 정경희 교수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우리나라 중고교 역사교육의 문제점을 절감하게 됐다. 대학생들을 통해 우리의 역사교육이 얼마나 심각하게 편향됐는지를 깨달은 정경희 교수는 이후 역사교과서에 관심을 가졌다.

    정경희 교수가 쓴 역사교육 관련 논문으로는 <미국 역사표준서 논쟁 연구>(《역사교육》 제89집, 2004년 3월), <역사교육을 둘러싼 한국과 미국의 이념논쟁 비교>(《미국학논집》 제40집 3호, 2008년 겨울), <세계사 교과서 속의 미국: 제7차 교육과정 세계사 교과서를 중심으로>(《역사교육》 제114집, 2010년 6월) 등이 있다.

    정경희 교수가 2013년 집필한, <한국사교과서 어떻게 편향되었나>는 학술논문이면서 동시에 대중적 성격도 갖고 있다. 이 책은 역사교과서 연구에 천착해 온 정경희 교수가 일반국민들에게 선사하는 값진 성과물이다.

    이 책을 통해, 일반 국민과 독자들이 현행 검인정 한국사교과서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 바탕위에서 국정 역사교과서 논쟁을 균형잡힌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귀한 연구 결과물의 연재를 흔쾌히 허락해 주신 정경희 교수와 비봉출판사 박기봉 사장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 목 차 -

    머리말

    1장. <중·고등학교 국사교육 개선을 위한 기본 방향>(1969): 민족주의적 국사교육의 시작

    2장. 1970년대 국사교육의 강화: 민족주의적 국사교육의 조장

    3장. 상고사 논쟁과 국사 교과서 파동: 중진급 역사학자의 교과서 집필 기피

    4장. 제4차 교육과정에 따른 국사 교과서 개정(1982)

    5장. 제5차 준거안 작성(1987): 국사 교과서 편향의 시작

    6장. 민중사학의 대두

    7장. 민중사학자들의 국정제에 대한 비판(1988)과 대중용 국사 교과서의 발간

    8장. 제5차 국사 교과서의 서술 변화와 국사 교과서에 대한 계속적 비판

    9장. 준거안 파동(1994)

    10장.‘한국 근·현대사’과목의 신설과 제7차 준거안의 편향성

    11장. 민중사학자들의 국사 교과서에 대한 끝없는 비판(2001)

    12장.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편향성과 그로 인한 교과서 파동(2002~2008)

    13장. 한국사 교과서의 여전한 이념 편향성



    5장. 5차 준거안 작성(1987): 국사교과서 편향의 시작

    1980년대 중반 이후 민주화 열기가 고조되고 통일 논의가 활성화되는 등, 사회적 변화 속에서 5차 교육과정이 1987년 3월에 개정·공포되어, 1989년부터 적용되게 되었다.

    문교부는 1987년에 처음으로 국사교과서 편찬 준거안을 내놓고, 이에 근거하여 국사교과서 개편 작업을 하기로 했다.

    5차 국사교과서 편찬의 준거가 된 「국사교육 내용 전개의 준거안」(이하 준거안으로 표기)은 몇 가지 점에서 우리나라 국사교과서가 오늘날과 같은 친북 좌편향 교과서가 되는 시발점이었다. 이러한 5차 준거안의 작성 배경과 문제점 등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1. 5차 준거안 작성 배경

    1987년에 새로이 국사교과서 편찬 준거안이 작성되기 전에 국사교과서 편찬의 준거가 된 것은 공식적으로는 1963년에 만든 「국사교육 내용 통일안」이 전부였다.

    「국사교육 내용 통일안」은 국사교과서에서 동일한 사실에 대한 해석 차이, 용어 표기의 불일치 등이 문제로 지적되자 이에 관한 교육 내용을 통일하기 위해 마련된 문건이다.

    문교부가 주관하여 구성한 국내 중견 학자들의 회의체에서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학계의 중지를 모아 만들어진 이 문건은 「편수자료」에 수록된 준법제적인 성격의 문건으로, 1987년에 처음으로 교과서 편찬 준거안이 만들어질 때까지 국사교과서 편찬의 준거가 되었다. 단군, 기자조선, 위만 조선 등의 고대사 관련 사항이 주를 이루므로, 근현대사와 관련한 내용은 거의 없다.

    (※ 문교부가 주관하여 구성한 국내 중견 학자들의 회의체에서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학계의 중지를 모아 만들어진 이 문건은 「편수자료」에 수록된 준법제적인 성격의 문건으로, 1987년에 처음으로 교과서 편찬 준거안이 만들어질 때까지 국사교과서 편찬의 준거가 되었다. 단군, 기자조선, 위만 조선 등의 고대사 관련 사항이 주를 이루므로, 근현대사와 관련한 내용은 거의 없다.)

    1987년에 새로이 준거안이 작성되게 된 배경은, 당시 준거안 작성 업무를 총괄했던 문교부 편수관에 따르면 다음의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 이때 준거안을 작성하게 된 배경 및 구체적 작성 경위에 대해서는 당시 문교부 편수관으로 준거안 작성 업무를 총괄했던 윤종영, 「국사교과서 편찬준거안」, 『실학사상연구』 10·11 합권, 1999, pp.681-763. 및 윤종영, 『국사교과서파동』, 혜안, 1999 참조.)


    ① 조선일보 특집기사로 인한 교과서 논란의 재점화

    1970년대 중반 이후 계속된 재야 사학자들의 국사교과서에 대한 문제 제기로 소송이 제기되거나 국회에서 청문회가 개최되었다. 이러한 교과서에 대한 논란은 1986년 조선일보의 특집 기사로 더욱 커졌다.

    1986년 조선일보는 광복 특집 기획으로 ‘국사교과서 새로 써야 한다’는 기획기사를 11회까지 연재했다.

    이 기획물의 주요 내용은, 우리나라의 기존 역사학계가 식민주의 사관에 물들어 일본이 의도적으로 왜곡한 우리 역사를 그대로 국사교과서에 쓰고 있으니, 이를 시정하기 위해 조속히 국사교과서를 새로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과서를 둘러싼 이러한 논란에 대한 문교부의 대책은 학계의 연구업적을 총 정리하여 국사교과서 편찬 준거안을 만들고, 이에 근거하여 국사교과서 개편 작업을 하는 것이었다.


    ② ‘학원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현대사 교육 재정립

    새로 준거안이 작성되게 된 데는 정치적 배경도 작용하였다. 1985년 11월 28일, 당정 정책 조정회의에서는 이른바 ‘학원사태’가 8.15광복 이후의 현대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판단하고, 현대사를 시대·정권별로 재정립해야 하며 역사의식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면서 구체적 대책을 강구하였다.

    당시에 전두환 정권은 진보좌파의 대두가 청년학생층의 한국 현대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고 보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 정권의 이러한 인식은 『한국민중사』사건으로 나타났다. 1987년 2월, 전두환 정권은 『한국민중사』를 판매금지하고 발행인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당시 검찰은 이 책의 저자들이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는 사관에 입각해 있으며, 이는 북한의 근로인민 대중을 역사의 주체로 삼는 관점과 일치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북한에 동조하는 내용의 책을 출판했다는 것이다.

    (※ 실제로 당시 정권의 이러한 인식은 『한국민중사』사건으로 나타났다. 1987년 2월, 전두환 정권은 『한국민중사』를 판매금지하고 발행인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당시 검찰은 이 책의 저자들이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는 사관에 입각해 있으며, 이는 북한의 근로인민 대중을 역사의 주체로 삼는 관점과 일치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북한에 동조하는 내용의 책을 출판했다는 것이다.)


    2. ‘국사교육 심의회’ 구성(1986)

    1986년 10월 문교부는 국사편찬위원회와 협의하여, 학계의 연구업적을 총 정리하여 국사교과서 편찬 준거안을 만들고 이에 근거하여 교과서 개편작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문교부는 국사교과서 편찬 준거안을 만들기 위해 ‘국사교육 심의회’를 구성하였다.

    심의회는 일제의 식민지 교육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고 재야 학자들에 대한 선입견을 덜 가지고 있는 40대의 중진 학자로 구성하여, 국사 문제에 새로운 시각을 갖고 접근하도록 했으며, 위원장으로 변태섭(서울대) 교수를, 부위원장으로 김정배(고려대) 교수를 선임했다. 그리고 30명의 위원 중 7인으로 연구실무팀을 구성했다.

    연구실무팀 - 대표 변태섭, 고대사 이기동·신형식, 중세사 박용운, 근세사 한영우, 근현대사 조동걸, 역사교육 김흥수.


    3. 5차 준거안의 주요 내용과 문제점

    1987년 6월 5일에 확정 발표된 준거안은 주로 고대사 문제에 집중된 것이지만 국사교육 내용 전반을 다루고 있어 근현대사 내용에 대해서도 중요한 원칙이 제시되었다. 이 5차 준거안 가운데 근현대사 부분은 다음의 6개항이다.


  • 5차 준거안의 근현대사 부분은 연구실무팀 7인 가운데 조동걸이 담당, 작성하였다. 5차 준거안 가운데 5항과 6항의 내용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광복 이후사를 발전적으로 서술하라는 내용으로서, 5차 교육과정에서 광복 이후 현대사의 서술 내용을 증면하는데 따른 자연스러운 것이다.

    5차 준거안에서 4차 교과서와 달라진 내용으로 주목할 만한 근현대사 관련 내용은 다음의 두 가지다.

    첫째, 5차 준거안에서 일제시기를 ‘일제강점기’로 파악하도록 함으로써, ‘일제강점기’라는 용어를 교과서 관련 문건에서 처음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 5차 준거안은 건국 이후의 국사교과서 가운데 처음으로 북한의 역사를 서술하도록 하고 있다. “광복 이후 북한의 역사 변천에 대하여 민족사적 차원에서 필요한 내용을 설명”하라는 것이다.

    우선 일제시기를 ‘일제강점기’로 파악하도록 하고 있는 준거안 내용에 대해 살펴보자. ‘일제강점기’는 북한이 만들어 낸 용어이다.

    북한은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일제시대를 ‘일제강점기’라 부르고, 그 이후를 ‘미제강점기’라 부른다.

    ‘미제강점’은 미국 제국주의자들에 의한 강제 점령의 준말로, 38도선 이남에 미군이 진주하면서 남한이 미국에 의해 점령당한 ‘미제강점기’가 시작되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북한의 역사 해석이다.

    북한역사서 『조선통사(하)』는 기본적으로 한일합병 이후 오늘날까지의 우리나라 역사를 ‘일제강점기’와 ‘미제강점기’로 구분하고 있다.

    이 책에서 일제강점과 관련된 용어는 수없이 사용되는데, 대표적인 것은 <일제의 조선강점>이라는 항 제목이다(p.117). 미제강점과 관련된 대표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제의 남조선강점으로 인하여 전후에도 우리나라는 통일되지 못하고 국토와 민족은 양분되여 있었고 남반부는 더욱더 미제의 식민지로 전락되여 갔다.”

       - (p.464). (북한)과학원 력사연구소, 『조선통사(하)』(1958년판), 오월, 1988.

    (※ 북한역사서 『조선통사(하)』는 기본적으로 한일합병 이후 오늘날까지의 우리나라 역사를 ‘일제강점기’와 ‘미제강점기’로 구분하고 있다. 이 책에서 일제강점과 관련된 용어는 수없이 사용되는데, 대표적인 것은 <일제의 조선강점>이라는 항 제목이다(p.117). 미제강점과 관련된 대표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제의 남조선강점으로 인하여 전후에도 우리나라는 통일되지 못하고 국토와 민족은 양분되여 있었고 남반부는 더욱더 미제의 식민지로 전락되여 갔다.”(p.464). (북한)과학원 력사연구소, 『조선통사(하)』(1958년판), 오월, 1988.)

    이를 간략하게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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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의 인터넷서점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북한 역사서 조선통사 표지. ⓒ www.book61.co.jp 화면 캡처
    ▲ 일본의 인터넷서점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북한 역사서 조선통사 표지. ⓒ www.book61.co.jp 화면 캡처
     
  • 1988년 도서출판 오월이 펴낸 북한 역사서 조선통사. ⓒ 블로그 역사서적 & 기념우표 사진 캡처
    ▲ 1988년 도서출판 오월이 펴낸 북한 역사서 조선통사. ⓒ 블로그 역사서적 & 기념우표 사진 캡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시점이다.

    일제시기를 북한의 용어인 ‘일제강점기’로 파악하도록 하고 있는 5차 준거안은 1987년 6월에 확정, 발표되었다.

    하지만 북한 원전(原典) 등의 도서에 대한 판매금지 해제, 즉 해금 조치는 1987년 ‘6·29 민주화 선언’의 후속 절차로 1987년 10월에서야 시작되었다. 5차 준거안이 해금 조치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5차 준거안의 근현대사 부분 작성자인 조동걸이 공식적인 해금 조치가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북한 역사서의 원전을 접했느냐, 아니면 북한 역사서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 서적을 통해서 북한의 역사 해석을 수용했느냐가 아니다.

    1987년 10월에 해금 조치가 이루어지기 전부터 이미 국사학계 일각에서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 북한 역사서 및 역사 해석을 접하면서 북한 학자들의 유물론적 역사 해석을 상당 부분 수용해왔기 때문이다.

    분야와 주제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주로 근현대사 연구자들인 이들 좌파 역사학자 가운데 일부는 일본을 비롯한 제3국을 통해서 접하게 된 북한의 역사 해석을 수용하고, 이를 책이나 논문 등 자신들의 저작물을 통해 확대 재생산했다.

    그 결과 북한에서 유입된 역사해석이 어느덧 우리나라 국사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북한의 역사 해석이 우리나라에서 수용되는 경로를 다룬 연구로는 오영섭, 「1940년대 후반 유물사가들의 동학농민운동 인식의 특징」, 『동학학보』 제9권 2호(통권 10호), 2005, pp.229-287이 대표적이다.

    이 연구는 북한의 동학농민운동 연구 성과가 우리나라 학계에 유입된 경로를 분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1940년대 후반에 나온 북한 유물사가들의 연구 성과는 1950년대 전반에 박경식, 강재언 등 일본의 조총련계 역사가들에게 직접적 영향을 미쳤고, 이들은 북한의 유물사관에 입각한 동학농민운동 연구 성과를 본격적으로 일본학계에 소개하였다.

    북한학계의 연구 성과를 충실히 소개한 그들의 동학농민운동 연구는 이후 일본학계 및 남한 학계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 5) 북한의 역사 해석이 우리나라에서 수용되는 경로를 다룬 연구로는 오영섭, 「1940년대 후반 유물사가들의 동학농민운동 인식의 특징」, 『동학학보』 제9권 2호(통권 10호), 2005, pp.229-287이 대표적이다.

    이 연구는 북한의 동학농민운동 연구 성과가 우리나라 학계에 유입된 경로를 분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1940년대 후반에 나온 북한 유물사가들의 연구 성과는 1950년대 전반에 박경식, 강재언 등 일본의 조총련계 역사가들에게 직접적 영향을 미쳤고, 이들은 북한의 유물사관에 입각한 동학농민운동 연구 성과를 본격적으로 일본학계에 소개하였다.

    북한학계의 연구 성과를 충실히 소개한 그들의 동학농민운동 연구는 이후 일본학계 및 남한 학계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조동걸을 비롯한 국사학자들이 북한의 조어(造語)인 ‘일제강점기’라는 용어에 대해 제대로 알고 사용했는가의 여부이다.

    만일 조동걸 등이 ‘일제강점기’가 ‘미제강점기’와 짝을 이루는 북한의 조어라는 사실을 알고도 사용했다면, 이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인식하고 있는 북한의 역사해석에 동조하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만일 ‘일제강점기’가 ‘미제강점기’와 짝을 이루는 용어라는 것을 모르고 사용했다면, 이는 학자로서 상당히 수치스런 일이다.

    ‘일제강점기’라는 용어의 의미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북한의 역사 해석을 무조건 따르는 것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물론 국사학자 가운데 일부는 ‘일제강점기’라는 용어가 북한의 한국 근현대사 인식을 대변해주는 북한의 조어라는 사실을 아직도 전혀 모른 채 사용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기는 하다.

    어쨌거나 조동걸은 5차 준거안을 작성하면서 일제시대를 ‘일제강점기’로 부르고, 이 시기를 ‘독립운동의 전개와 발전’으로 파악하도록 하였다.

    이 준거안에 따라서 5차 국사교과서는 일제시대 전체를 ‘민족의 독립운동’이라는 단원으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준거안과 달리, 5차 국사교과서에서 ‘일제강점기’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다.

    이른바 ‘진보좌파’ 학자들도 1990년대까지는 이 시기를 ‘일제시대’ 또는 ‘일제하’로 불렀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강만길, 『일제시대빈민생활사연구』, 창작과비평사, 1987; 한국역사연구회,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사』, 한길사, 1991; 지수걸, 『일제하농민조합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3. 등이 대표적이다.

    1987년에 일제시대를 ‘일제강점기’로 부르는 조동걸의 준거안 내용이 너무도 급진적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민족사적 차원”에서 북한의 역사를 서술하라는 조동걸의 준거안 내용은 ‘일제강점기’라는 용어와는 달랐다. 준거안 지침대로 5차 국사교과서에서는 <통일을 위한 노력>이라는 절에서 처음으로 북한의 역사가 서술되기 시작했고, 이후의 국사교과서에서 북한 관련 역사 서술은 그 비중이 점점 더 커져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조동걸은 국사교과서에서 북한의 역사를 서술하도록 했는가? 아래에서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조동걸은 1980년대 후반에 이른바 ‘민중사학’이 본격적으로 대두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국사학계의 일부 진보좌파 성향 학자들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전반에 이미 ‘민중사학론’을 제기하였다. 강만길의 분단사학론과 이만열, 정창렬의 민중적 민족사관이 그것이다.

    조동걸도 이들과 함께 역사학이 현실참여의 학문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역설해 온 인물이다. 그는 현실참여의 구체적인 방안으로 북한에 대한 연구는 물론, 북한역사를 초중등학교에서 교육할 것을 주장했다.

    조동걸은 북한의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민족 공동의식을 유지하는 불가결의 조건으로서, 분단 후에 태어난 세대들이 북한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 민족의식을 유지함으로써 통일을 앞당기게 하는 길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 7) 이주영, 「‘민중·통일 사학’의 실체와 그 충격」, pp.151-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