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현재 사용 중인 검인정 고교 한국사교과서. ⓒ MBN 캡처
    ▲ 현재 사용 중인 검인정 고교 한국사교과서. ⓒ MBN 캡처

    [편집자 주]

    정부가 중학교 역사 및 고교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 전환 방침을 밝히면서 이른바 '역사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을 비롯한 야당과, 전교조 및 친전교조 성향의 학부모단체, 수정주의 민중사관이 장악한 국사학계는 정부의 방침을 '유신독재 시대로의 회귀'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아직 필진조차 구성되지 않은 국정 역사교과서에 대해 '친일 독재 미화'라는 낙인을 이미 찍었다.

    역사교과서가 국정이 되면, 친일과 독재를 미화할 것이란 이들의 주장은 근거가 전혀 없지만, 그 파급력은 매우 크다. 이미 상당수 국민들이 이들의 주장에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북한 전체주의를 '살기 좋은 복지 국가'로, 김일성을 '민족의 영웅'처럼 묘사하고 있는 현재의 검인정 한국사교과서들이 안고 있는 심각한 역사왜곡 실태는 일반 국민과 언론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다.

    이런 상황이 가능한 이유는 진보를 자처하지만 실제는 북한 전체주의를 추종하는 이들이, 현행 검인정 한국사교과서들의 역사왜곡을 철저하게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일반 국민들이 현행 검인정 한국사교과서의 비뚤어진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한다면, 국민들이 막연한 불안감에 야당과 국사학계의 주장에 휘둘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놓고 벌어지는 현재의 논란은, 속칭 진보를 자처하는 북한 전체주의 추종세력과 자유민주주의 보호 세력이 벌이는 사상-문화전쟁이다.

    자유를 훼손하는 자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민주주의는 보호받을 가치가 없으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확한 사실의 전달이 중요하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질식시키려는, 전체주의 추종세력의 역사-사상왜곡과 거짓된 선전전에 맞서기 위해서는, 현행 검인정 한국사교과서의 실체를 국민들에게 바로 알리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다.

    이에 뉴데일리는 현행 검인정 한국사교과서가 어련 과정을 거쳐 편향성을 띠게 됐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는 한 편의 논문을 소개한다.

    이 논문은 2년전 <한국사교과서 어떻게 편향되었나>라는 제목의 서적으로 출간된 상태다.

  • ▲ '한국사교과서 어떻게 편향되었나' 책 표지. ⓒ 비봉출판사 제공
    ▲ '한국사교과서 어떻게 편향되었나' 책 표지. ⓒ 비봉출판사 제공

    뉴데일리는 위 책의 저자인 정경희 영산대 교수와, 이책을 펴낸 비봉출판사(대표이사 박기봉)의 허락을 얻어, 위 책의 내용을 원문 그대로 연재한다.

    이 책은 현행 검인정 한국사교과서가 안고 있는 이념적 편향성의 뿌리를 규명하고 있다. 나아가 검인정 한국사교고서를 오염시킨 이념적 편향성의 근원이 친북-반대한민국적 민중사관이란 사실과, 민중사관이 어떻게 한국사교과서에 녹아들게 됐는지도 보여주고 있다.

    저자인 정경희 교수(영산대 자유전공학부)는 서울대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서양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다. 서울대와 서강대, 성균관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탐라대 교수, 미국 캘리포니아대(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 역사학과 객원교수, 아산정책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을 지냈다.

  • ▲ 정경희 영산대 교수. ⓒ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정경희 영산대 교수. ⓒ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정경희 교수는 처음 <미국을 만든 사람들>, <中道의 정치: 미국 헌법 제정사> 등의 저서 및 논문을 통해, 주로 미국사 연구에 주력했다.

    그러나 정경희 교수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우리나라 중고교 역사교육의 문제점을 절감하게 됐다. 대학생들을 통해 우리의 역사교육이 얼마나 심각하게 편향됐는지를 깨달은 정경희 교수는 이후 역사교과서에 관심을 가졌다.

    정경희 교수가 쓴 역사교육 관련 논문으로는 <미국 역사표준서 논쟁 연구>(《역사교육》 제89집, 2004년 3월), <역사교육을 둘러싼 한국과 미국의 이념논쟁 비교>(《미국학논집》 제40집 3호, 2008년 겨울), <세계사 교과서 속의 미국: 제7차 교육과정 세계사 교과서를 중심으로>(《역사교육》 제114집, 2010년 6월) 등이 있다.

    정경희 교수가 2013년 집필한, <한국사교과서 어떻게 편향되었나>는 학술논문이면서 동시에 대중적 성격도 갖고 있다. 이 책은 역사교과서 연구에 천착해 온 정경희 교수가 일반국민들에게 선사하는 값진 성과물이다.

    이 책을 통해, 일반 국민과 독자들이 현행 검인정 한국사교과서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 바탕위에서 국정 역사교과서 논쟁을 균형잡힌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귀한 연구 결과물의 연재를 흔쾌히 허락해 주신 정경희 교수와 비봉출판사 박기봉 사장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 목 차 -

    머리말

    1장. <중·고등학교 국사교육 개선을 위한 기본 방향>(1969): 민족주의적 국사교육의 시작

    2장. 1970년대 국사교육의 강화: 민족주의적 국사교육의 조장

    3장. 상고사 논쟁과 국사 교과서 파동: 중진급 역사학자의 교과서 집필 기피

    4장. 제4차 교육과정에 따른 국사 교과서 개정(1982)

    5장. 제5차 준거안 작성(1987): 국사 교과서 편향의 시작

    6장. 민중사학의 대두

    7장. 민중사학자들의 국정제에 대한 비판(1988)과 대중용 국사 교과서의 발간

    8장. 제5차 국사 교과서의 서술 변화와 국사 교과서에 대한 계속적 비판

    9장. 준거안 파동(1994)

    10장.‘한국 근·현대사’과목의 신설과 제7차 준거안의 편향성

    11장. 민중사학자들의 국사 교과서에 대한 끝없는 비판(2001)

    12장.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편향성과 그로 인한 교과서 파동(2002~2008)

    13장. 한국사 교과서의 여전한 이념 편향성



    1장. 「중·고등학교 국사교육 개선을 위한 기본방향」(1969) :
    민족주의적 국사교육의 시작


    우리나라 국사교과서는 1970년대 이래 역사인식의 주체를 국민 혹은 국가가 아니라 민족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그것도 민중적 관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 마디로 우리나라의 국사교과서는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특징은 197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국사교과서 내용 서술의 방향을 크게 규정해 온 것으로, 한우근, 이기백, 이우성, 김용섭의 4인이 1969년에 제출한 정책연구 보고서 「중 ‧ 고등학교 국사교육 개선을 위한 기본방향」(이하 「기본방향」으로 표기)에서 비롯되었다.

    이 「기본방향」이 작성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60년대에 한국사 학계는 본격적으로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민족사관이라는 새로운 한국사상(韓國史像)을 세우기 위한 구체적인 작업을 시작했는데, 이에 앞장 선 학자가 1960년대 전반 학계에서 자리를 잡은 제1세대 한국사학자의 대표적 인물인 이기백과 김용섭이다.

    이기백은 반도적 성격론, 사대주의론, 당파성론 등 식민사관의 문제점을 지적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정체성론을 처음으로 비판하면서 민족주의 역사학의 발전적 계승을 강조했다.

    김용섭은 조선후기 농업사에서 자본주의 맹아의 존재를 확인하는 등, 이른바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한 한국사 연구를 통해서 식민사관을 극복하려 했다. 그는 한국사의 발전과정을 사적 유물론의 방법론을 원용하여 정리하면서도 ‘계급사관’에 매몰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또한 그는 ‘신민족주의사학’에서 제기했던 ‘민족’문제도 크게 중시하였다. 즉 김용섭은 한국사 전체를 계급문제와 민족문제를 중심으로 파악하려는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민족사관을 수립하는 것을 최대의 과제로 삼고 있던 이기백, 김용섭 등은 한우근, 이우성과 더불어 1969년에 「기본방향」을 작성했다. 이들 4인이 제시한 새로운 국사교과서 편찬을 위한 ‘시안작성의 기본 원칙’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국사의 전체 기간을 통하여 민족의 주체성을 살린다.
    2) 민족사의 각 시대의 성격을 세계사적 시야에서 제시한다.
    3) 민족사의 전체 과정을 내재적 발전 과정으로 파악한다.
    4) 제도사적 나열을 피하고 인간 중심으로 생동하는 역사를 서술한다.
    5) 각 시대에 있어서의 민중의 활동과 참여를 부각시킨다.

    이 기본 원칙 다섯 가지는 당시 국사학계의 주된 학문적 동향이던 민족사관과 내재적 발전론의 중심 내용을 거의 망라한 것이다. 이 국사교육의 5가지 기본 방향은 이 때 마련된 이후 오늘날까지 국사교과서 편찬의 기본 지침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보아 ‘1969체제’라고도 불린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1969체제’에서 제시된 민족주의가 훗날 민중사학이 성장하는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기본방향」에서 제시된 새로운 국사교과서 편찬을 위한 기본 원칙 다섯 가지를 보면 민중사학과 기존의 국사학 연구, 즉 ‘전통사학’이 민족주의를 공통분모로 하여 연계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

    ‘전통사학’이 ‘식민사관’의 정체성 이론을 비판하기 위해 내세운 ‘내재적 발전론’만 하더라도 조선사회에서도 근대적인 요소가 싹트고 있었음을 부각시키는 과정에서 민족주의에 대한 강조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1960년대부터 이미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한국사 연구 풍토가 생겨났는데, 이러한 풍토가 장차 1980년대에 민족주의적 민중사학이 우세해지는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즉 근래의 몇몇 『한국 근·현대사』교과서에서 나타나는 친북 성향의 맹목적 민족주의는 이 ‘1969체제’에서 제시된 민족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본방향」에서 제시된 민중적 민족주의의 시각은 주로 일제 식민사학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의 급격한 변화와 시대적 전환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맹점을 지니고 있다.

    경제성장의 가속화와 민주화의 달성 등, 80년대 이후 우리 사회는 우리역사를 민족주의적 관점에서만 보지 않아도 될 만큼 변화했다. 따라서 일제시기 민족주의 또는 60~70년대의 민족주의는 오늘날의 변화된 시대상황에 맞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국사교과서는 여전히 “폐쇄적인 민족주의의 사슬”에 단단히 속박되어 있다.



    2장. 1970년대 국사교육의 강화: 민족주의적 국사교육의 조장


    1972년 10월 유신을 전후하여 박정희 정부는 대한민국의 정통성 및 10월 유신체제의 정당성 확립을 위한 방법 중의 하나로 국사교육 강화 방침을 제시했고, 여기에 관련 학계의 목적이 부합되면서 국사교과의 독립, 「국사의 중심개념」 확립, 국사교과서의 국정화가 이루어졌다.

    「국사의 중심개념」에서 제시된 국사교육의 목표는 민족주체성의 확립을 위한 민족사관 교육이었다. 이는 앞서 1969년에 제시된 「기본방향」, 즉 ‘1969체제’에서 강조된 민족사관 교육의 맥을 1970년대 초에도 그대로 잇고 있는 것이다.

    국사교과서의 국정화가 이루어지면서 만들어진 첫 번째 국사교과서는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강조하는 교육과 유신체제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교육을 둘 다 추구하고 있다. 즉 3차 국정 교과서의 특징은 민족주체성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박정희 정부가 체제 유지를 위해서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국사교육을 강화했던 것은 상당 부분 사실이다.

    그런데 이때 이루어진 국사교육 강화의 결과로 오늘날의 국사교육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학계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국가주의 이데올로기가 강화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민족주의가 조장되었다는 사실이다.

    1970년대 초의 국사교육 강화와 그 의미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자.

    1. ‘국사교육 강화 위원회’ 설치

    1970년 초, 아시아국가에 대한 미국의 군사개입은 더 이상 없으리라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닉슨독트린이 공식 선포되면서 동·서 진영은 해빙무드에 휩싸였다. 본격적인 데탕트가 시작됨에 따라 남북한의 대결구조도 변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8월 15일에 북한의 무력행사 포기를 요구하고 남북한의 적대관계를 체제경쟁관계로 전환할 것을 제의하는, 이른바 ‘8·15선언’을 내놓았다. 남북한의 본격적인 체제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1972년 초 박정희 대통령은 ‘국적 있는 교육’을 내세우면서, “우리의 국가현실에 알맞는 교육을 위하여 주체적인 민족사관을 정립하고, 민족주체사상을 확립하여 한민족 국가의 정통성이 우리 대한민국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여 북괴의 남침야욕을 억지해나가야만 한다.”고 강조하고 나섰다.

    박정희 대통령이 민족사관 정립 및 민족주체사상의 확립, 이에 입각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강조하자 정부는 1972년 5월, 국사교육 강화를 위한 시책들을 발표했다.

    정부는 국사교육 강화 방침의 하나로, 교과과정의 개편 등 국사교육의 기본방안을 만들 심의기구인 ‘국사교육 강화 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했다.

    문교부는 학계의 중진학자 16인과 대통령 비서관 등 4인을 합하여 총 20인으로 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중 실무연구팀으로 이선근, 강우철, 이광린, 최창규, 김철준, 이원순, 이기백을 선정하여 소위원회를 구성했다.

  • ▲ 국사교육 강화 위원회   ⓒ 뉴데일리
    ▲ 국사교육 강화 위원회 ⓒ 뉴데일리

    ‘국사교육 강화 위원회’에서 이루어진 것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국사교과의 독립이요, 둘째는 「학교 교육을 중심으로 – 국사의 중심개념」 확립, 셋째는 국사교과서의 국정화이다.

    이 가운데 첫째와 둘째는 ‘국사교육 강화 위원회’ 소위원회가 이루어 낸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순서대로 살펴보자.

    가. 국사교과의 독립(1973)

    소위원회는 국사교과의 독립이 필요하다는 1차 건의서를 제출하였고(1972년 7월), 정부는 이를 수용하여 종래 중학교와 인문계 고등학교 사회과에 들어있던 국사를 독립 교과로 확정했다.(1973년 8월)

    학계에 따르면 이처럼 국사가 독립 교과로 확정된 근본 원인은 당시의 정치상황에 있었다. 1972년 10월 유신을 전후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 및 10월 유신체제의 정당성 확립을 위한 방법 중의 하나로 정부의 국사교육 강화 방침이 제시되었고, 여기에 관련 학계의 목적이 부합되면서 국사과가 독립되었다는 것이다.

    나. 「학교 교육을 중심으로 한 국사의 중심개념」(1973)

    1973년 5월, 소위원회는 각 시대별 주제 항목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아 「학교 교육을 중심으로 – 국사의 중심개념」(이하 「국사의 중심개념」으로 표기)이라는 연구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국사의 중심개념」은 새 국사교과서 내용의 기틀이 되는 동시에 국사 내용에 대한 학계에서의 공식 학설로 받아들여졌다.

    즉 국사교육 강화 위원회에서 제시된 국사교육의 목표와 내용이 3차 국사과 교육과정에 대부분 반영되었다.

    그런데 이 「국사의 중심개념」을 보면, 거의 모든 항목이 ‘민족’을 운위하면서, 민족과 국가를 등치시키고 있다. 즉 「국사의 중심개념」에서 제시된 국사교육의 목표는 민족주체성의 확립을 위한 민족사관 교육이었다.

    이보다 앞서 1969년에 제시된 「기본방향」, 즉 ‘1969체제’에서 강조된 민족사관 교육의 맥이 1970년대 초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 국사교과서의 국정화(國定化)(1973)

    국사교과의 독립, 「국사의 중심개념」 확립과 더불어 당시의 국사교육 강화 방침에 따라 이루어진 또 하나의 시책이 국사교과서의 국정화이다.(1973.6.23)

    당시 2차 교육과정에 의거한 검인정 체제로 중고등학교에 각각 11종의 국사교과서가 있었으나 1974학년도부터는 국사교과서가 국정 교과서로 단일화되었다. 1974년 2월 22일, 문교부는 주체적 민족사관 확립을 위주로 발간된 국사교과서를 신학기부터 쓴다고 발표했다.

    이 1974년의 국정 교과서는 국사과 교육과정 및 국사교육 강화 위원회에서 제시한 「국사의 중심개념」을 중심으로 집필되었는데, 과거의 교과서와 달리 민족주체성을 강조하였으며 당시 학계의 새로운 연구업적을 많이 반영하였다.

    이 3차 국정 교과서에는 당시 교과서의 국정화를 통해서 정부가 지향한 국사교육의 방향이 잘 드러난다. 3차 국정 교과서의 주요 특징은 다음의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강조

    3차 국정 교과서는 2차에 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서술이 더 늘어났는데, 이는 남북 간 체제 대결에서 우위를 확보하고자 했던 박정희 정권이 북한과의 정통성 경쟁에 적극 나선 결과이다.

    즉 해방 이후 곧바로 남북한으로 분단되었지만, 3·1운동과 임시정부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이어받은 대한민국에 그 정통성이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 유신체제의 당위성에 대한 강조

    3차 국정 교과서 고등학교 국사의 ‘현대 사회’ 단원은, 민족의 시련(6·25)―민주주의의 성장(4월 학생의거, 5월 혁명)―대한민국의 발전(경제성장, 새마을운동, 10월 유신)의 순서로 서술되고 있다.

    학계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우리 민족에게 ‘과거의 시련’은 있었으나 ‘4월 학생의거’와 ‘5월 혁명’으로 민주주의가 성장하고 있으며 민족중흥의 계기로 ‘10월 유신’이 이루어졌다는 역사인식을 규정하고자 하는 의도가 명확히 드러난다고 해석하고 있다.

    민족사의 정통을 계승하고 있는 유신체제하에서 민족의 중흥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국정화된 국사교과서의 근현대사 관련 부분은 10월 유신체제의 역사적 당위성을 확립하려는 정부의 의도를 충실히 반영하였다는 것이다.

    요컨대 3차 국정 국사교과서의 특징은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강조하는 교육과 유신체제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교육을 둘 다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2. 1970년대 국사교육 강화의 의미

    1970년대 초에 이루어진 이상과 같은 국사교육 강화의 의미에 대해 학자들은 성향에 따라 커다란 시각 차이를 보인다.

    우선 진보좌파 성향의 학자들은 국사교육 강화에 대해 하나같이 매우 비판적이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에 걸쳐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앞세우면서 독재권력을 강화해나가던 박정희 정권이 국가주의의 강화에 한국사학계를 이용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은 1968년 「국민교육헌장」을 선포하여 교육을 비롯한 사회 전체적 차원에서 국가주의를 크게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972년 초 박정희가 ‘국적있는 교육’을 표방하면서, 주체적인 민족사관의 정립, 민족주체사상의 확립 등을 강조하고 나서면서 초중등학교에서 국사과목이 독립교과가 되는 등, 국사교육이 강화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10월 유신 이후에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민주세력의 줄기찬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면서, 국가를 위해 민권은 유보될 수 있다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국민들에게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즉 국수주의적·복고주의적 ‘민족주체사관’을 내세워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한층 강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1979년에 있었던 3차 국사교과서의 부분 개정도, 1970년대 초에 이루어진 국사교육 강화 시책과 마찬가지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 강화를 위한 방편이었다고 비판한다.

    그 주장을 들어보자. 1970년대 후반기부터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 움직임이 민주화 운동과 연계되어 반정부 운동으로 확산되면서 박정희 정권의 역사적 정통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커져 갔다.

    해방 전후의 역사, 특히 군정과 대한민국의 성립 과정에서 식민지 잔재의 청산이 불완전하였으며, 따라서 박정희 정권이 반민족적, 반역사적 정권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러자 정부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화시킬 필요를 느꼈고, 그 결과 1977년에는 장학방침으로 ‘국민 정신 교육의 강화’를 강조하기 시작하였으며, 거의 같은 시기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창설되었다.

    나아가 정부는 근현대의 민족사적 발전 과정과 대한민국의 성립 과정 및 그 발전 과정이 역사적 정통성에 입각한 것이었음을 밝히기 위해서 1974년 이후 사용되던 기존의 『국사』교과서에 『시련과 극복』 교과서를 합친 개정 교과서를 1979년에 발간했다.

    개정된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의 조선시대 부분은 내재적 발전론, 민족사관에 입각하여 기술되었다. 또한 주체적 민족사관 정립을 위한 국난 극복의 과정이 크게 반영되었다.

    ‘동학’이 ‘동학농민혁명 운동’으로 바뀌었으며, 독립협회와 의병항쟁이 전면적으로 강조되었다. 또한 식민지 통치의 강화, 일제의 민족성 말살 정책, 임시정부 활동, 독립군 항쟁, 민족 문화의 수호 등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내용 변화는 활발해지는 민주화와 반정부 운동에 대처하여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유신체제의 정당성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박정희 정권 시기의 역사교육은 민족주체성을 강조함으로써 민족적 자긍심과 정체성을 강화하는데 일정 정도 기여했지만, 애국심을 맹목적인 국가주의나 집단주의적 정서와 동일시했다고 비판을 받는다.

    국사교과서가 국가와 민족의 순수성과 그에 대한 충성을 강조함으로써 서술의 주체가 바뀔 때마다 우월성과 순수성, 충성의 대상을 변경해야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사교과서 현대사 부분이 바뀌면서 정권을 홍보하는 내용으로 마무리 짓는 방식이 관례화되고, 이후 국사교과서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반영되어 서술된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의 주장처럼 박정희 정부가 체제 유지를 위해서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국사교육을 강화했던 것은 상당 부분 사실이다.

    그런데 이때 이루어진 국사교육 강화의 결과로 오늘날의 국사교육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가 강화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민족주의가 조장되었다는 사실이다.

    1970년대 초에  각급 학교에서 국사교육이 강화되고, 대학에서도 국사가 국책 과목으로 필수가 되는 등, 국사 우대 정책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1960년대 이래의 국사학계의 민족주의를 더욱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74년에 처음으로 발행된 국정 교과서는 과거의 교과서와 달리, 민족주체성을 강조하였다.

    국사 우대 정책으로 조장된 민족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신채호의 ‘민족사학’이 신성시되었다. 그리고 민족주의의 대의명분은 어느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절대 선(善)이 되고 민족과 관련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만능 약으로 생각될 토대가 마련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