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development)의 뜻

    1945년 8월 15일, 일제는 패망하였습니다. 영구병합과 동화정책의 구호가 그토록 요란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황급하게 고향으로 철수했습니다. 아무도 남아 달라고 붙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토록 허망했던 것이 일제의 동화정책이었습니다. 역시 처음부터 되지도 않을 무리한 프로젝트였지요. 그런데 일제가 철수한 뒤의 조선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시 1910년 대한제국이 패망할 그 당시로 복귀한 것일까요. 식민지수탈론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마치 난폭한 구둣발에 짓밟혀 있던 풀이 구둣발이 치워지자 다시 허리를 펴는 식의 그러한 원상회복을 말입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나라를 다시 찾았다고도 하지요. 공식적으론 ‘광복’이라 합니다. 다 잘 아시는 대로 대한민국의 가장 큰 국경일은 ‘광복절’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런 식의 원상회복론에 찬성하기 힘들군요. 식민지 지배는 물리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화학적인 작용이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제5장에서 식민지근대화론을 소개하면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식민지기에 식민지적 형태의 근대화라는 변화가 있었음을 주장하는 학설이지요. 그에 따라 사회와 경제의 구조가 바뀌었습니다. 무엇보다 인간들이 옛날의 그 인간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경제학에서는 발전 또는 개발이라 합니다. 영어로는 development라고 하지요. 이는 성장, 영어로 말해 growth와는 상이한 개념입니다. 성장은 사람의 키가 크는 것과 같은 뜻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국민 소득이 1,000달러에서 2,000달러로 되는 것, 그것이 성장입니다. 그러나 개발, development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영어 단어의 기원은 생물학에서 나왔습니다. 애벌레가 성충이 되는 과정, 바로 그것이 개발입니다. 모양과 기관이 바뀌고 복잡화하는 것이지요. 한 사회가 역사적으로 개발되었다거나 발전했다고 하면, 그것은 그 사회의 운동 원리와 그 사회의 부속 기관이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어 마치 성충이 애벌레로 돌아갈 수 없듯이 불가역적인 변화를 겪는 것을 말합니다.

    얼마 전에 허수열 교수가《개발 없는 개발》(은행나무, 2005)이란 책을 내어 우리의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하였습니다. 식민지수탈론 측에서는 기다리던 용사가 나타났던 식으로 반겼던 것으로 압니다. 이 책의 요지는 식민지기에 총소득이 증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모두 일본인 차지가 되고 조선인의 소득 수준에는 변함이 없었다는 겁니다. 허 교수는 이를 통계로 입증한다고 애를 썼습니다만, 제가 보기엔 일종의 편집증에 가까운 추론에 불과합니다. 그에 대해서는 이미《재인식》에 실린 주익종 박사의 논문이 잘 꼬집고 있고, 또 김낙년 교수도 별도의 서평을 통해 그 논리적 모순을 명확히 하고 있기 때문에(《경제사학》38, 2005) 여기서는 그에 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개발’이란 말이 아주 잘못 쓰이고 있음에 대해선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허 교수의 주장대로라면 ‘성장 없는 성장’이라 해야 옳지요. 그는 개발이 원래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가 진정 ‘개발 없는 개발’을 입증하고 싶었다면 일제가 사유재산제도를 비롯하여 근대적 경제환경을 조성하여도 조선 사람들은 그에 도무지 적응할 능력이 없을 정도로 미개하였음을 증명하든가, 아니면 일제가 조선 사람들의 근대적인 경제활동을 철저하게 봉쇄하여 영구병합의 동화정책을 처음부터 포기하였음을 주장하든가 해야지요. 저는 ‘개발 없는 개발’을 한갓 희언(戱言)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물적 유산

  • 1961년 이승기 박사의 비날론 개발을 기념하는 북한의 우표. ⓒ 뉴데일리
    ▲ 1961년 이승기 박사의 비날론 개발을 기념하는 북한의 우표. ⓒ 뉴데일리

    그럼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이 땅에 남긴 유산이 무엇인지 차근히 따져 보도록 합시다. 유산이라 함은 우선 물적인 것으로 공장 등의 생산시설과 철도 등의 사회간접자본을 들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보이지 않은 것들로서 숙련이나 기업가능력 등의 인적 자본을 들 수 있습니다. 이외에 사유재산제도와 같은 제도적 유산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물적 유산과 관련해서는 남한과 북한의 사정이 크게 달랐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제는 북한에 지금까지 알려진 것 이상의 풍부한 물적 유산을 남겼습니다. 1930년대 후반부터 추진한 군수공업화의 결과였지요. 해방 후 1946년 현재 북한에서는 대략 800개 이상의 대규모 공장이 가동 중이었습니다. 제철·제련·전기·화학 등, 당시로선 세계 첨단 수준의 공장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1939년 이후 일본에서 건너온 전기·화학공업의 대규모 공장은 종업원 수가 3,000 또는 6,000을 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만,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 해도 200개가 넘습니다. 그 외에 북한에 깔린 철도망은 1인당 철도길이에서 일본보다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1인당 발전량도 북한은 일본을 능가하는 수준이었습니다.

    해방 후 이들 첨단 공업시설의 일부는 철거되어 점령군 소련의 전리품으로 넘어갔지만, 거의 대부분은 북한정부에 정상 인계되었습니다. 그 상당 부분이 한국전쟁 과정에서 미국군의 폭격으로 파괴외었다고 합니다만, 드러난 건물이나 저장시설이야 그러했지, 분리 가능한 핵심 설비를 폭격의 대상으로 방치해 둘 정도로 북한의 지도부가 어리석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흔히들 북한이 1960년대까지 남한보다 경제적으로 앞섰다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그렇게 된 것은 그들이 선전하는 대로 사회주의 생산력의 덕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북한이 일제로부터 받은 물적 유산이 풍부했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나중에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겠습니다만, 1950년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도발할 수 있었던 것도 개인화기나 화약에 관한 한, 북한은 이미 자체 생산능력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하자면 남한에는 군수산업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한 남북한의 경제구조와 경제력의 차이가 김일성으로 하여금 한국전쟁을 도발하도록 유혹했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반면에 남한이 일제로부터 물려받은 물적 유산은 빈약하였습니다. 남한은 쌀농사 중심의 농업지대였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남한에서 가장 큰 산업은 수출 쌀농사였습니다. 공업시설이라곤 양조장·정미소와 같은 식품가공업이나 인쇄업·도자기업 따위가 주종을 이루었을 뿐입니다. 그 밖에 서울, 부산, 대구와 같은 도시에 면방직·견직 산업으로 몇 개 큰 공장이 있었던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1934년부터 도시를 중심으로 산업전기가 보급되자 서울 부근에 중소 기계공업이 조금 발달합니다만, 대개 공장제수공업의 수준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이들 남한의 공업시설은 해방 후의 혼란기에 많이 훼손되었으며, 남았던 것도 한국전쟁 과정에서 60% 이상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제도적 유산

    그렇지만 남한은 일제가 남긴 또 다른 역사적 자산을 소중히 잘 보존하였습니다. 다름 아니라 근대적인 법, 제도와 시장경제체제가 그것이었습니다. 앞서도 지적하였습니다만, 이런 것들은 원래 서유럽에서 발생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해 일제가 남긴 것이라기보다 20세기 인류가 공유하는 선진 문명의 자산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앞서도 여러 번 지적하였습니다만, 이러한 근대적인 법과 제도는 일제가 한반도를 영구병합하기 위해 이식한 것이었습니다. 해방 후의 대한민국은 이러한 근대 문명으로서 법과 제도를 그대로 보전하고 또 발전시켰습니다. 경제에 관해 더 자세히 소개하면, 일제는 1937년 이후 전시기에 접어들면서 시장경제체제를 상당 부분 중지하고 국가사회주의적인 통제정책을 취합니다. 식량의 강제수매, 곧 공출과 배급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일제의 전시경제체제는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해체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수립될 때는 보다 자유로운 시장경제가 활성화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대한민국은 일제를 통해 이 땅에 들어온 시장경제체제를 복구하고 발전시켜 오늘날과 같은 번영하는 시장경제를 성취하게 된 것이지요.

    반면에 사회주의 북한은 풍부한 물적 유산을 받았지만 일제를 통해 들어온 근대적인 법과 제도를 폐기하고 말았습니다. 1946년 북한은 ‘건국 20개 조항’을 발표하면서 “일제가 통치의 목적으로 시행한 모든 법을 폐지한다”고 하였습니다. 아울러 “일제의 재판기구를 인민으로부터 선발된 대표에 의한 인민재판기구로 대체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근대적인 인간으로서 인격권과 재산권을 규정한 민법이 폐지되고, 또 사법(司法)에 의한 재판기구를 대신하여 인민재판이 행해지게 되면 그 사회의 인간들은 어떻게 됩니까. 다시 국가의 농노와 같은 신세로 전락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게 북한은 근대문명을 부정하고 말았습니다. 앞서 저는 근대화란 애벌레가 성충이 되는 생물학적으로 불가역적인 변화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변화과정을 강제로 중단시키면 그 애벌레는 어떻게 됩니까. 비틀린 불구의 상태가 되고 말지요. 그렇게 북한은 비극적이게도 문명의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산다는 사회주의의 아름다운 이상, 그 혁명의 열기에 들떠 있던 당대인들이 그러한 문명사의 비극을 어찌 예감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인간정신의 본질인 자유, 그 자유의 물적 토대인 재산제도가 폐지되면 그러한 비극이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지난 20세기의 세계사가 남긴 소중한 교훈이지요.

    인적 자본

    대한민국이 식민지기로부터 계승한 유산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아니 이 경우는 유산이라기보다 우리 민족의 높은 문화적 능력이 자기 의지로 애써 축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높은 교육 수준의 인적 자본입니다. 대중의 교육열이 폭발하는 계기는 3·1운동이었습니다. 민족의 긴 장래를 위해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민족적 자각이 움튼 것이지요. 1920년대의 대중교육은 적령기 아동의 취학률을 20~30% 수준으로 끌어 올립니다. 교육열은 1920년대 후반에 주춤하였다가 1930년대가 되면 다시 폭발합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입학 지원이 정원을 초과하여 소학교에 입학하는 데도 해를 넘기면서 순서를 기다릴 정도였습니다. 1930년대 말이 되면 적령기 아동의 취학률이 남자의 경우 60%를 넘어서지요. 대중의 이러한 교육열에 밀려 일제도 할 수 없이 1946년부터 의무교육제를 시행한다는 계획을 내놓을 정도였습니다.

    중등 이상의 고등교육도 확대되었습니다. 총독부는 고등교육의 대중적 확대에 무척 인색하였습니다. 고급 인재를 많이 길러내서는 그들의 지배정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모양이지요. 중학교 이상의 고등교육기관은 대중의 교육열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일본으로의 유학 행렬이지요. 유학생의 수는 이상하게도 중일전쟁이 터진 1937년부터 부쩍 그 수가 증가하는데, 1942년 현재 총 2만 9,427명에 달했습니다. 그 중에 2만 2,044명, 75%가 중학생이었습니다(《일본유학 100년사》, 재일한국유학생연합회, 59쪽).

    요사이 돈 있는 집안에서는 자식들을 미국이나 영어권의 초·중·고등학교에 보내고 있는데, 통계를 보니 2003년에 1만 132명, 2004년에 1만 6,446명이군요. 그런데 그에 준하는 유학생의 행렬이 이미 1940년대에 있었던 겁니다. 식민지의 가난한 민중이 무슨 돈으로 유학을 보냈을까요. 좀 더 세밀히 연구해 볼 문제입니다만, 제 가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1930년대 초부터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1930년대 말이면 일본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지요. 그러자 국내에 있는 그들의 친척집 아이들이 그 위를 따르는 겁니다. 중학교에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건너가서는 돈이 없으니까 신문배달, 우유배달 하면서 악착같이 공부하는 것이지요. 요사이는 거의 없어졌습니다만 제 세대까지만 해도 친숙한 고학생(苦學生)이란 말이 그렇게 생겨났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총독부의 각급 관서와 학교에 관리와 교사로 취직하였습니다.《재인식》에 실린 나미키 마사히토(並木眞人) 교수의 <식민지기 조선인의 정치참여>에 의하면 1940년경 그 수가 거의 17만에 달하였습니다. 주로 하급직이었습니다만, 조선인 관리와 교사의 수는 일본인보다 많았습니다. 그렇게 1910년부터 총독부의 관리와 교사를 지낸 사람이 모두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연구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수십만에 달할 것입니다. 이외에도 금융조합·수리조합 등의 조합과 은행·회사 등에 취직하여 근대적인 행정과 경제활동을 훈련받은 고급 인력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들이 해방 후 대한민국을 떠받친 세력이었습니다.

    나미키 교수는 식민지기의 대일(對日) 협력을 이데올로그형과 테크노크라트형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전자는 이광수와 같이 정신마저 일본식으로 되자고 한 사람들로서 전시기의 징병·징용에 적극 협력한 사람들이 되겠습니다. 후자는 위에서 말한 하급직 관리, 조합원, 은행원, 회사원, 그 밖에 의사와 법률가 등으로 근대분야에서 전문적인 지식과 기능을 쌓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대일 협력은 소극적인 것이었으며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해방 후 이데올로그형의 협력자는 정치적으로 소거되었습니다만, 후자는 대한민국의 건국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관련하여 나미키 교수는 제헌의회 의원의 약 30%가 테크노크라트형 인물이었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그렇게 연속적이었다는 겁니다.

    무엇보다 귀중한 인적 자본은 점포와 공장과 회사를 경영한 상인과 기업가들이었습니다. 1920년대 이후 전통사회의 보부상을 대신하여 고정적인 점포를 소유하게 된 상인의 수가 부쩍 증가하여 1939년 현재 점포의 수가 39만 6,000이나 됩니다. 1939년 현재 조선인으로 5인 이상 종업원의 공장을 경영하는 사람은 4,000명에나 달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집단을 창립한 삼성의 이병철, LG의 구인회, 현대의 정주영 회장 등이 포함되어 있지요. 이병철 회장은 정미소로 시작했는데, 자서전을 보니 정미소가 아니라 마산의 미두(米豆) 선물시장에서 큰돈을 벌었더군요. 역시 큰 상인은 큰 시장에서 놀았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국제적으로 큰 시장에서 훈련받은 기업가 능력이 다소나마 축적되어 있었기에 신생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일어설 수 있었던 겁니다. 더구나 북한이 사회주의화하자 거기서 살 수 없게 된 수많은 사람이 남쪽으로 내려왔지요. 그 수가 한국전쟁 이전에 이미 100만이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는 상당수의 상인과 기업가가 있었습니다. 그 역시 대한민국으로선 값진 유산이었습니다. 예컨대 해방 후 남한에서 메리야스·양말·고무신·유리 공장을 세운 사람들은 대개 북한에서 활동하던 기업가들이었습니다.

    충성과 반역의 정신세계

    마지막으로《재인식》에 실린 카터 에커트(Carter Eckert) 교수의 논문, <식민지 말기 조선의 총력전·공업화·사회변화>를 소개하겠습니다. 이 논문 역시 식민지기와 해방 후의 연속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에커트 교수가 연속성의 화두로 잡은 것은 전쟁입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20세기는 전쟁의 역사였지요. 노일전쟁(1904),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 한국전쟁(1951), 베트남전쟁(1967) 등등이지요. "이들 전쟁 가운데 만주사변에서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15년간만큼 한국인에게 직접적이고 중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없었다. 전쟁은 한반도를 제국의 공업화된 기지로 변형시키면서 조선의 경제구조를 극적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그 과정에서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사회경제적 변화, 곧 근대화가 유발되었다. 그에 따라 조선인으로서 노동자와 기술자와 기업가와 관료의 수가 늘어나고 그 질이 향상되었다. 1960년대 이후 ‘한강의 기적’이라 불린 한국의 급속한 근대화혁명을 주도한 박정희를 위시한 장교 그룹도 바로 그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이상이 에커트 교수의 논문입니다.

    몇 가지 논점을 제외하고 저는 에커트 교수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예컨대 그는 1960년대 이후 국가주도형의 개발 모형이 이미 식민지기에 성립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재인식》에 실린 김낙년 교수의 논문이 잘 비판하고 있는 그대로 동의하기 힘듭니다. 총독부가 박정희 정부만큼 경제개발에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경제에 깊숙이 개입했다고 보기는 힘들지요. 그건 그렇고, 인적 자본의 면에서 해방전후사를 연속적으로 보고있는 에커트 교수의 시각에 대해 저는 이의가 없습니다. 더구나 이후 근대화 혁명을 주도한 장교단이 일본군 내에서 배양되었다는 지적은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그들은 원래 일본 천황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입니다. 전쟁과 전쟁의 시대에 식민지의 아들로 태어나 나폴레옹처럼 위대한 군인이 되고 싶었던 스무 살 나이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친일파였다는 비판에 저는 아무런 지적 긴장을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그들의 내면세계는 어떠했을까, 거기서 충성과 반역의 대상으로서 민족은 얼마나 실체적이었던 것일까, 천황을 위해 죽겠다는 맹세의 정신세계는 역설적으로 충성의 대상이 대한민국으로 바뀌었을 때 같은 식의 맹세로 이어질 논리적 필연을 안고 있지 않은가, 그 논리적 필연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한 인간 내면의 논리적 필연에까지 분석의 손길이 미친 연구는《재인식》에 없습니다. 그런 고급의 논문을 읽기 위해서는 좀 더 기다려야 되는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