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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롤랑 바르트의 신화 분석
     이발소에 들른 어느날 롤랑 바르트는 이발사가 내민 ‘파리 마치’의 표지를 바라본다. 잡지 표지에는 프랑스 군복을 입은 한 흑인 젊은이가 눈을 들어 삼색기에 잡힌 주름을 바라보며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한 흑인 병사가 프랑스식 거수경례를 한다’, 이것이 일차적인 기호 체계 속에서의 하나의 기표이다. 경례하는 흑인의 사진이라는 형식적 의미는 간단하고 고립적이고 빈약하다. 그러나 바르트는 곧장 이 이미지의 의미를 간파한다. 즉 프랑스는 위대한 제국이라는 것, 모든 프랑스의 아들은 피부색의 구분 없이 삼색기 아래에서 충심으로 봉사한다는 것, 그리고 반식민주의들에게는 이 흑인의 애국심보다 더 훌륭한 대답이 없다는 것을 이 사진은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때는 알제리 전이 한창이던 1950년대의 프랑스였다.
     
    끝없는 추모 기사   
    온 종일 반복되고 반복되던 미담, 영웅담, 추모행렬 화면은 솔직히 지루했다. 장례식과 함께 끝나는가 했더니, 봉하 마을에 차려진 분향소에 계속 사람들이 몰려 오는데 관청의 지원이 끊기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기사에서부터 덕수궁 앞 분향소를 경찰이 강제 철거하는 것은 추모 열기를 방해하는 공권력의 횡포라는 둥 기가 차고 말이 안되는 기사들이 선진국을 지향한다는 국가의 공영방송에서 버젓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이미 수십번 수백번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TV 방송들은 다시 기획편성하여 사그러지는 불꽃에 불을 지폈다. 만만한 사람을 비판할 때는 그리도 준엄하게 꾸짖던 보수 신문들은 무엇이 두려운지, 비판이라고 해봤자 아주 조금 변죽만 울리는가 하면, 뒤늦은 여진(餘震)인듯 새삼 비중 있는 칼럼니스트의 노무현 송(頌)을 연일 내보내고 있었다.

    그리하여 ‘차별 없는 세상과 도덕정치를 꿈꿨던’ 통치자였던 그는 ‘한국 정치의 구렁텅이에 자신을 던지는 생명공양(生命供養)’을 했고, ‘그가 겪어왔던 인간적인 고뇌와 국가적 고민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를 한사코 수용하기를 거부하는 남다른 고집과 열정에서 비롯’되었는가 하면, ‘서민적이고 탈권위적인 정치 리더 노무현의 삶과 정치는 파우스트적 고투(苦鬪)’로 찬양되었다. 몸을 던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했다는 ‘저기 사람이 가네!’라는 말과 ‘담배 있나’라는 물음은 거의 잠언(箴言)의 반열에 올랐다. 어떤 대중 칼럼니스트는 그렇게 맑은 영정을 본 적이 없으며, 그의 얼굴은 중독성이 있다고 말했다.

    반복되는 것은 호감을 준다
    그렇다. 이 정체불명의 대중문화 필자가 한껏 찬양한답시고 쓴, ‘중독성’이라는 말에 노무현 현상의 비밀이 있다. 수백 수천번 반복적으로 보여준 소탈한 모습은 TV 앞에 앉은 사람들의 의식을 마비시켜 그를 친근하게 만들었다. ‘반복되는 것은 호감을 준다’라는 서양의 속담은 만고의 진리이다. 그 친근감 속에서 그가 부패 혐의의 피의자였다는 사실은 어느 새 슬그머니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의 ‘한반도 평화정책’이 북한으로 하여금 핵을 만들게 했고, 그의 장례식 기간 동안에도 핵실험을 했다는 것, 그의 소위 ‘국가 균형 발전’이라는 것이 ‘선거에서 재미를 좀 본’ 득표율로 연결되었다는 것, 그가 내세웠던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은 박연차, 강금원 사태가 보여주듯 적나라한 반칙과 특권으로 이어졌다는 것,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서민 대통령’은 실은 미국에 간 자기 자식들에게 수백만 달러씩을 건네주는 부자였다는 사실이 마치 마술사의 모자 속으로 사라져 버린 토끼처럼 밀짚 모자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언론이 진실을 얼마나 은폐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특유의 사례로 언론학의 연구 대상이 될만 하다.
     
    신화의 탈역사성
    신화는 역사가 없다. 언제, 어느 장소가 아니라 그냥 막연히 ‘옛날 옛적 어느 마을에서’이다. 신화는 합리성이 없다. 웅녀(熊女)는 처음에 곰이었는데 쑥과 마늘을 먹고 100일간 동굴 속에서 참고 지낸 후 사람이 되어 환웅(桓雄)과 결혼하고 단군을 낳았다. 여기서 곰이 어떻게 사람이 되느냐,라는 합리적 설명은 필요 없다. 그냥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신화는 반복적이고 강제적이다.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끊임없이 전달되고 반복되며 다져져서 마침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어떤 실체가 되는 것이다. 

    인류학적 기원의 신화는 수천년의 세월을 거쳐 서서히 형성되지만 강력한 대량 전달매체의 시대인 현대는 그 세월을 압축하여 단기간에 신화가 형성된다. 현실이란 완벽히 역사적인 것임에도 저널리즘이나 예술 또는 국민 정서라는 가상의 실체를 통해 탈역사적인 신화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신화는 사람들의 이해를 구하는듯 하면서 사실은 무섭게 강요한다. 문제는 강요 당하면서도 강요 당한다는 의식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반복성, 중독성의 문제이다. 신화는 기호학적 체계인데, 다시 말하면 누군가의 가치가 거기에 투입된 가치체계인데, 신화의 소비자는 그것을 사실체계로 간주한다. 마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듯한 자연 현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신문 독자 혹은 TV 시청자로 하여금 순진무구하게 신화를 소비하도록 하는 것은 이처럼 신화가 가진, 소위 역사의 자연화 기능이다.

    신화는 대상을 문학화, 예술화, 사적 영역화한다
    신화는 자신이 이야기하는 대상에서 역사를 제거할뿐만 아니라 대상을 문학화, 예술화하고, 사적인 영역으로 끌어내려 원초적 감성에 호소한다. 마치 부모를 잃은 불효자 느낌을 갖는다느니,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했을 짐을 그의 등으로부터 우리의 등으로 옮겨야 한다느니, 그는 떠났지만 아직 우리는 그를 다 보내지 않았다느니 하는 문학적 수사(修辭)들이 그것이다.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했을 짐’이라니, 언제 우리가 대통령이라도 되어 본적이 있는가? 여기에 자연인이 아닌, 한 나라의 대통령이었던 사람의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성찰은 눈꼽만치도 없다. 

    불교 승려들도 한 차례 감탄했던,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유서 구절에 대해 한 작가는 ‘사람이 곧 자연이고 하늘이다’라고 자못 비장하게 화답했다. 사람이 곧 자연이고,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문학적인 담론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훌륭한 기능을 갖고 있지만 엄격하게 이성적이어야 할 부분에 아무 때나 끼어드는 문학적 감수성은 냉철해야 할 인문과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일이다. 

    전직 대통령의 불행한 죽음을 알리는 첫 날, 한 신문의 일면 제목은 ‘그 분이 다 안고 가셨으니 이제 싸움은 그만 해야’였다. 한 시장 할머니의 말을 인용한 것인데, 이웃집의 가장이 죽었을 때, 혹은 싸움 많은 집안의 식구가 죽었을 때 나이 많은 할머니가 하는 말로는 적합하고 감동적인 말이겠지만, 엄격한 팩트와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언론의 제목으로는 아무래도 황당한 일이었다. 이것이 신화의 ‘사적 영역화’이다.         

    신화는 동어반복이다
    동어반복은 “연극, 그것은 연극이다”와 같이 동일한 것으로 동일한 것을 규정하는 언어 방식이다. 우리는 설명이 궁할 때 동어반복 속으로 피신한다. 귀찮게 조르는 아이에게 부모가 “그러니까 그런거야”라고 강압적으로 말할 때처럼 사람들은 합리적인 설명을 할 수 없을 때 동어반복에 의존한다. 동어반복 속에는 두 가지의 살해가 있다. 우선 합리적인 것을 죽인다. 동어반복은 때맞춰 쓰러지는 일종의 실신이고, 유리한 실어증이며, 혹은 한 편의 코미디이다.
     
    신화는 양(量)으로 질(質)의 가치를 정한다
    질(質)의 양화(量化)도 신화의 한 특징이다. 모든 질을 양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신화는 사람들의 이해력을 절약시켜 준다. 봉하 마을에 다녀간 100만명, 전체 조문객 수 5백만명이라는, 이 엄청난 숫자들은 혹시 있을지도 모를 반대의 감정을 일도양단으로 제압한다. 온통 노란색으로 가득 채워진 TV 화면을 보며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갖지 못하거나 다중의 숫자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역대 국민장의 추모객 수를 넘어서고, 추기경 장례 때의 추모객 수도 능가했다는 홍보 중에는 장례 경비도 24억으로 역대 국민장의 비용을 훌쩍 넘어섰고, 그 대부분이 국민의 세금으로 나갔다는 사실은 교묘하게 감춰져 있다.  
     
    이미지는 가장 강렬한 매체
    신화는 하나의 의사소통 체계, 곧 하나의 메시지이다. 모든 것은 신화가 될 수 있다. 메시지의 질료 중에서 이미지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이미지는 분석이나 분산없이 단번에 의미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밀짚 모자는 하나의 밀짚 모자이다. 틀림없이 그렇다. 그러나 TV 화면이 반복해서 보여줬던 밀짚 모자는 더 이상 그냥 하나의 밀짚 모자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신화적 소비에 알맞게 재단된 모자, 서민의 이미지가 부여되고, 문학적으로 배려된 밀짚 모자, 간단히 말해 순수한 재료에 가상의 재료가 한 껏 덧붙여진 메시지로서의 모자가 되었다. 

    메시지는 음성 언어 또는 문자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글로 씌어진 담론뿐만 아니라 사진, 영화, 르포르타주, 스포츠, 공연, 광고 이 모든 것이 신화의 매체가 될 수 있다. 어떤 질료이든 상관없이 자의적으로 의미가 부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어떤 물건도, 그 어떤 표상도 결코 순결하지 않다. 세상 질료의 가장 단순한 요소인 색(色)마저 신화에 동원된다. 노란색 원복을 입고 줄지어 가는 유치원 아이들이 병아리처럼 귀여웠는데, 그 노란색을 더 이상 순수하게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신화의 기호학
    바르트의 기호학적 신화 분석은 100여년 전 소쉬르가 수립한 언어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소쉬르에 의하면 모든 기호는 기표(記表)와 기의(記意)의 결합체이다. 우리가 ‘나무’라고 말을 할 때 우리 귀에 들리는 ‘나무’라는 발음이 기표(시니피앙)이고, 그 소리가 의미하는 ‘나무’라는 개념이 기의(시니피에)이다. 청각적인 이미지만이 아니라 종이 위에 ‘나무’라고 쓴 글자 또한 기표이다. 그러니까 모든 단어는, 더 나아가 모든 언어는 기표와 기의의 결합체이다. 기표와 기의의 결합체를 기호(記號)라고 한다. 기호란 자기 아닌 다른 것을 표현해 주는 중간의 매체이다. 모든 언어가 기호이고, 모든 이미지, 모든 표상이 기호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제1의 기호학 체계이다.

    그러나 제1의 기호학 체계는 제2의 기호학 체계로 곧장 넘어간다. 일차적으로 장미꽃은 ‘장미꽃’이라는 음성 혹은 문자로 된 기표와 ‘장미꽃’이라는 개념의 기의가 결합된 하나의 기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장미꽃’이라는 기호가 기표의 역할을 하면서 거기에서 ‘열정’이라는 기의가 파생된다. 신화가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 제2의 기호 체계에서이다. 

    프랑스 중학생이 라틴어 사전을 펼치고 그 속에서 이솝 우화의 한 문장을 읽는다. quia ego nominor leo. 이 문장은 “내 이름은 사자이기 때문이다”라는 단순한 의미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이 문장은 중학생에게 다른 것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속사(屬辭)일치 규칙을 예증하는 문법의 한 예’이다. 그에게 이 문장은 사자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또는 사자가 자신을 명명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 문장의 진정한 최종 의미작용은 어떤 속사일치의 존재 여부이다. 

    더 나아가 이것은 라틴어 문법이 교육되던 시대, 사회적인 차별에 의해 선별적으로 라틴어를 교육하던 특정 시기의 역사, 이솝 우화에서 이런 인용문을 끄집어내는 교육 전통 등의 기의를 가질 수도 있다. 이처럼 신화에서 기표는 빈약하지만 기의는 한없이 풍부하다.

    다시 ‘지금 여기’
    50대의 소박하게 생긴 남자가 눈물을 줄줄 흘리는 동영상이 있다. ‘눈물 흘리는 초로의 남자’ 이것이 일차적인 기호체계이다. ‘눈물 흘리는 초로의 남자’라는 기표는 단 하나뿐이지만 거기서 파생되는 기의는 무궁무진하다. 이 기호를 기표로 삼아 거기서 서민성, 소박성, 감성 같은 2차적 기의가 발생한다. 신화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신화를 깨부수는 것, 냉철한 이성을 찾는 것, 이것이야말로 좌파 이데올로기도 우파 이데올로기도 아닌 ‘사람 사는 세상’의 진정한 화두가 되어야 한다. 앗! 그러고보니 나도 어느 새 신화의 게임 속에 편입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신화의 특징을 하나 더 추가해야겠다. 신화는 상징을 즉 언어를 도둑질해 간다. 우리는 도둑 맞은 언어를 되찾아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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