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운동권도 운동권 지적 헤게모니에 눌려 

    역설적이게도 대학생활이 즐거워지기 시작한 것은 이른바 ‘패밀리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우선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채울 수가 있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민중경제론”(박현채 외), “전환시대의 논리”(이영희), “지식인을 위한 변명”(샤르트르), “역사란 무엇인가”(E.H.카) 등의 책들을 밤을 새워가면서 읽었다. 그리고 자취방에 모여서 ‘세미나’를 했다. 당시 운동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 가운데 하나가 아마도 ‘세미나’일 것이다. ‘세미나’는 ‘패밀리 생활’의 기본으로서, ‘의식화 학습회’를 그렇게 불렀다. 기본교재를 나눠서 ‘발제’(요약 정리)한 뒤, 몇 가지 주제를 잡아서 토론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보통 세미나는 3학년 선배가 지도했는데, 선배들의 해박한 지식에 혀를 내두르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쓴 웃음이 나오는 부분이기도 하다. 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그야말로 지적으로 신생아나 마찬가지 상태였다. 그런 대학 신입생들에게 정치, 경제, 역사, 철학, 문학 등 모르는 것이 없어 보이는 선배들의 지적 권위는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지적 권위는 비단 운동권 학생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른바 비(非 )운동권 학생들도 운동권의 지적 헤게모니에 장악돼 있었다. 당시 학생들은 스스로를 ‘학구파’, ‘고시파’, 운동권파‘ 등 3가지 파(派)로 분류하고 있었다.(혹자는 ‘연애파’를 추가해서 4가지로 분류하기도 했다.) 이공계는 조금 달랐지만, 적어도 사회대에서 ‘학구파’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매우 극소수였을 뿐만 아니라, 운동권 학생들에게 지적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당시 운동권 학생들은 정말로 열심히 공부했다. 문제는 그 공부 내용이었다. 그럼 당시 운동권 지하대학의 기본 커리큘럼을 살펴보도록 하자. 소위 패밀리마다 다소 차이가 있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골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의식화의 기본교재 ‘해방전후사의 인식’

    첫 단계는 이른바 ‘벽 깨기’이다. 운동권의 1학년 1학기 교양과목들인 셈이다. 이 단계에서의 주요 목표는 신입생들의 기존 관념을 마구 흔들어 놓는 것이다. 앞서 서술한 책들이 이 단계에서의 기본 교재들이었다. 신입생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대학입학 이전에 배워온 그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기존 관념을 파괴시키면서, 대학 정규교육과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감을 극대화시키는 작업이 진행된다. ‘벽 깨기’란 기존의 ‘체제순응적(?)’의 벽을 깬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필자만 하더라도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준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사실 대학 입학 전만 하더라도 박헌영, 여운형 등의 이름은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1930년대 후반부터 독립운동을 주도한 세력이 공산주의 세력이었다니? 옳고 그름을 떠나 일단 엄청난 지적 심리적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이야기하는 베트남 전쟁 이야기는 충격을 넘어선 것이었다. 당시 베트남 전쟁에 대해 아는 것은 자유 베트남을 지키기 위해 미국 한국 등이 지원했으나 베트남 국민들의 분열로 공산화됐다는 정도였다. 그런데 호치민이 ‘민족해방운동’의 지도자였으며 베트남 전쟁의 본질은 “미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에 맞선 베트남 민중의 피에 어린 투쟁”이었다니?! 지적 충격과 함께 묘한 지적 특권의식을 맛보기 시작했다. “너희는 이런 것도 모르지? 한심한 것들!” 비(非)운동권 학생들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었다. 더욱이 소위 ‘판금’(販禁) 서적이 주는 밀교(密敎)적 분위기는 이러한 우월감을 더욱 부채질했다. “판매금지라고? 도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지만, 우리는 볼 수 있다는 선민의식(先民意識)마저 생겨났다.

    이러한 ‘벽 깨기’가 진행된 뒤에, 소위 정규 커리큘럼으로 넘어가는데, 정규 커리큘럼의 첫 단계는 대부분 ‘경제사’(經濟史)로 시작됐다. 여기서 경제사라는 것은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이다. ‘구주 경제사’(歐洲 經濟史, 大塚久雄 著, 岩波書店)과 같은 일본 좌파들의 경제사 책들이 주요 교재로 사용됐다. 필자의 경우는 당시 이른바 ‘검은 책’(책 표지가 검은 색이었기에 그렇게 불렸다!)으로 불린 ‘서양경제사’(최종식)를 탐독했다. 원시공산체제에서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 근대 자본제로 넘어가는 경제사 이야기는 흥미진진했다. 저녁에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다음날 오후였던 것을 기억한다. 당시 필자의 심정은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쳤을 때와 같은 환희(?), 바로 그런 것이었다. 다시 말해, ‘세상의 진리’를 깨달았으며 그 진리를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착각(?)하기 시작한 것이다.(이러한 어설픈 지적 교만에 대해서는 하이에크의 ‘치명적 자만’에 잘 설명돼 있다. 20여년이 흐른 뒤에 하이에크의 ‘치명적 자만’에 대해서 읽어 보았는데, 당시 ‘유레카’를 외치던 필자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얼굴이 화끈거림을 느껴야만 했다.)

    일본어책 강독 여부가 운동권 여부 구별 척도

    이러한 경제사 학습은 빠르면 여름방학 합숙부터, 늦으면 2학기부터 시작됐다. ‘합숙’이란 말 그대로 방학기간 중에 특정한 장소에 모여 함께 먹고 자면서 학습하는 과정을 말한다. 적게는 3박4일, 많게는 7박8일 정도 진행됐다. 여름 합숙을 포함해서 여름방학 동안에 진행된 주요 커리큘럼의 하나가 ‘일본어 학습’이었다. 당시 일본어 책을 강독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운동권이냐 아니냐를 구별하는 하나의 척도이기도 했다. 한자음 발음 같은 것은 무시하고, 뜻만 새기는 방식으로 진행된 일본어 강독은 당시 암파서점(岩波書店) 혹은 대월(大月) 등과 같은 일본 좌파 출판사 서적을 읽기 위한 것이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독하게 진행됐다. 합숙 당시, 필수 문법사항과 어휘에 대한 간단한 테스트가 매일 진행됐으며, 그 테스트를 통과하지 않으면, 식사할 권한을 박탈당했다. 심지어 “올해 너희 과 미달이었지? 그렇지 않으면, 너 같은 돌대가리가 입학할 수 없었을 텐데…”라는 모욕까지 받아야만 했다.

    간단한 일본어 교육을 받은 뒤, 처음 읽은 일본어 책이 일명 ‘자구발’로 운동권에 널리 알려져 있던 ‘자본주의의 구조와 발전’이란 책이었다. 이 책은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쉽고 단순하게 설명한 책이었는데, 세상의 진리의 모든 핵심은 이 책에 있다고 착각(?)했었다. 읽고 또 읽어서 거의 암기할 수준까지 읽었다.

    경제사 다음 커리큘럼은 앞에서 이야기한 ‘자구발’로 시작되는 소위 ‘정치경제학’(政治經濟學)이다. 여기서 정치경제학이란 정치학과 경제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이야기한다. ‘자구발’ 이외에 ‘경제학 원론’(대월 출판사), ‘소유와 생산양식’(일명 ‘소생’) 등과 같은 일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책들과 서구 좌파인 폴 스위치와 모리스 돕의 경제학 책들이 교재 혹은 보조교재로 사용됐다. 앞서 말한 비운동권에 대한 지적 우월감은 2학기에 들어오면서 더욱 극대화됐다. 이제 우리는 영어와 일본어로 된 원서마저 들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었다. “너희들! 폴 스위치와 모리스 돕의 자본주의 이행 논쟁이 뭔지 알아?”

    국민윤리시간을 운동권이 맡아 마르크스 강의

    이 단계가 되면 슬슬 교수들을 우습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특히 당시 필수과목이었던 ‘국민윤리Ⅱ’와 같은 과목은 ‘사상투쟁’ 훈련장으로 역이용하기도 했다. 국민윤리Ⅱ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이란 부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반공교육을 위한 개설된 강좌였다. 그런데 대부분의 강사는 사회과학 훈련이 덜 된 젊은 강사들이었으며 이들의 경우 자신의 전공 정치학이나 경제학에 대해서는 안다 하더라도 다른 비전공 분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허점을 파고들었다. 정치학 전공 강사가 반공교육을 하면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비판하면 그 강사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퍼부었다. 당황한 젊은 강사는 씩씩거리다 나가곤 했다.

    아니 운동권 출신 강사가 국민윤리Ⅱ를 가르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데올로기 부분은 운동권이 장악했으며, 따라서 이 부분 전공한 젊은 박사과정 강사들의 상당수가 운동권 출신(물론 미전향)이었다. 이들이 비판부분을 빼고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반공시간에 가르치는 웃지 못 할 일들마저 벌어지곤 했다. 원로교수들은 이런 국책과목을 맡는 것 자체를 꺼리고 있었던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