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원일 제독 부인 홍은혜 여사, 첫번째 '해군 부녀회' 모금 주도
  • ▲ 대한해협해전에서 맹활약한 해군 백두산함  ⓒ 정책브리핑
    ▲ 대한해협해전에서 맹활약한 해군 백두산함 ⓒ 정책브리핑

    해군에서도 아주 큰 도움을 주셨는데요. 특히 해군 역사상 2번째로 부녀회에서 바자회를 열어 저희들을 도와 주셨어요. 1948년 해군 창설 당시 미국에서 군함을 사올 때 바자회를 펼쳤던 이후로 2번째로 부녀회가 나서 주셨어요.


    영화 <연평해전>을 연출한 김학순 감독은 지난달 <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수년 전 <연평해전> 제작비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던 당시, 대규모 바자회를 연 '해군 부녀회'의 활약 덕분에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한 바 있다.

    행사를 진행하면서 해군들도 놀랐던 것 같아요. 스스로 결속되는 느낌도 받고…. 그 분들도 애초엔 그렇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전국 각지에서 "우리 물건을 기증하겠다"는 분들이 수도 없이 몰려든 거예요. 그러면서 엄청난 거금이 모이게 된 겁니다. 크라우드 펀딩 자체에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영화 투자에 관심을 보이던 업체들도 '연평해전'이 주제라는 말을 듣고는 슬그머니 발을 빼던 시절, '해군 부녀회'는 마치 자신들의 일처럼 두 팔을 걷어붙이고 제작비 모금에 힘을 보탰다.

    김학순 감독에 따르면 이렇게 '해군 부녀회'가 전사적으로 나서서 모금 운동을 벌인 것은 역사상 2번째라고 한다. 첫 번째는 한국전쟁에서 맹위를 떨친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PC-701)'을 미군에서 사들여올 때였다.

  • ▲ 손원일(孫元一) 제독  ⓒ 정책브리핑
    ▲ 손원일(孫元一) 제독 ⓒ 정책브리핑

    대한민국 해군 창설의 주역인 손원일(孫元一) 제독은 1930년 상해 국립중앙대 농학원 항해과를 졸업한 후 1945년 조국광복과 더불어 해군창설에 투신했다.

    "함선도 없는 해군 수장이 대장이라면 외국 사람이 웃는다"며 한사코 '대장' 진급을 고사했던 손 제독은 1949년 6월 '함정건조기금갹출위원회'를 구성, 실전 배치가 가능한 군함을 구입하기 위한 모금 운동에 나섰다.

    손원일 제독을 포함한 장교들은 10%, 병조장은 7%, 하사관 이하는 5%의 월급을 매월 성금으로 기탁했다. 해군 장병들의 부인들은 삯바느질 등 발품을 팔아 돈을 모았다. 이렇게 십시일반 모인 돈이 1만 5,000 달러가 됐고 정부지원금 4만 5,000달러를 합해 도합 6만 달러의 거금이 조성됐다.

    이 돈으로 우리 해군은  백두산함, 금강산함, 삼각산함, 지리산함 등 총 4척의 '제대로 된' 군함을 구입할 수 있었다.

    당시 '해군의 아내'들을 독려하며 기금 마련에 힘썼던 여장부는 홍은혜(洪恩惠). 바로 손원일 제독의 아내였다. 이화여전을 졸업하자마자 꽃다운 나이에 손 제독의 아내가 된 홍은혜 여사는 그날부터 '대한민국 해군의 어머니'가 됐다.

    <조선일보> 28일자 지면에 실린 '문갑식의 세상읽기 - 100세 아내에게 하늘의 남편이 보낸 선물'이란 칼럼을 읽어 보면, 홍은혜 여사의 파란만장했던 삶의 단편을 엿볼 수 있다.

    해방병단이 창설되던 날, 홍은혜는 시장에 가다 어디론가 뛰어가는 해군을 보았다. 그가 입은 네이비 블루 군복은 겨울바람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얇았다. 남편이 가르치는 학생들이 어떻게 지내나 싶어 학교에 감자와 고구마를 바구니 가득 가져갔다. 저녁에 보니 바구니는 텅 비어 있었다. 홍 여사는 "저렇게 잘생긴 젊은이들이 추위에 떨고 흙 묻은 감자와 고구마를 허겁지겁 먹어치울 만큼 허기져 있는 걸 그때 깨달았다"고 했다.


    이 칼럼에는 해군 창설 때부터 동생 같은 장병들을 아꼈던 홍은혜 여사가 자신이 만든 군가(軍歌), '바다로 가자'의 높은 음을 장병들이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숱하게 울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사관학교 교장 선생님 부탁으로 제가 작곡한 군가를 생도들에게 가르치러 갔어요. 2기, 3기생들이었는데 높은음(音)을 내지 못하더라고요. 속으로 '얼마나 배가 고프면 저럴까' 싶었어요. 많이 울었습니다. 우리 해군은 그렇게 춥고 배고픈 상황에서 나라를 지킨 거예요.

    우리들은 이 바다 위에

    이 몸과 마음을 다 바쳤나니

    바다의 용사들아 돛 달고

    나가자 오대양 저쪽까지

    나가자 푸른 바다로

    우리의 사명은 여길세

    지키자 이 바다 생명을 다하여


    해마다 6월 29일이 되면 경기도 평택 해군 2함대사령부 실내체육관에선 홍은혜 여사가 작곡한 '바다로 가자'가 울려 퍼진다.

    병사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이 군가는 이날 만큼은, 산화한 6용사(故 윤영하 소령, 한상국 중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의 영혼을 뜨거운 눈물로 어루만지는 진혼곡이 된다.

    "지키자 이 바다 생명을 다하여"라는 비장감 넘치는 가사는 연평해전 당시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진 장병들을 떠올리게 한다.

    35년 전 남편 손원일 제독을 여읜 홍 여사는 지금도 틈만 나면 떡을 싸 들고 해군 병사들을 찾아간다고 한다.

    이름도 출신도 성도 모두 다른 장병들이지만, 하얀 제복을 몸에 걸친 이상 모두가 자식 같다는 홍 여사. 안충준 전 유엔평화유지군사령관이 홍 여사를 '해군의 어머니', '국군의 어머니'로 칭송해 마지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6.25 전쟁 직전, 삯바느질로 군함 구입비를 마련하고, 전후엔 경제 부흥 자금을 조성하는데 밑거름이 된 <어린이합창단>을 이끌었던 홍은혜 여사가 어느덧 100세가 됐다는 소식이 들린다.

    영화 <연평해전>으로 6용사의 충혼(忠魂)이 위로 받고 있는 이 시기, '해군의 어머니'가 상수(上壽)를 맞이했다는 것도 기쁜 일이지만, 최근 일본 문헌에서 손원일 제독의 '독립운동 기록'이 발견됐다는 사실 역시 우리 해군의 경사가 아닌가 싶다.

    '창설 70주년'을 맞은 대한민국 해군의 앞날에 호국영령들의 가호를….

  • ▲ 고 손원일 제독의 부인 홍은혜 여사(왼쪽 두번째)와 장남 명원씨가 7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강로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11월 호국인물 손원일 제독 추모행사에서 분향하고 있다. 2013.11.7   ⓒ 연합뉴스
    ▲ 고 손원일 제독의 부인 홍은혜 여사(왼쪽 두번째)와 장남 명원씨가 7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강로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11월 호국인물 손원일 제독 추모행사에서 분향하고 있다. 2013.11.7 ⓒ 연합뉴스



    은인의 등에 비수 꽂은 김일성

    손원일 제독의 아버지 손정도(孫貞道) 목사는 6.25전쟁을 일으킨 원흉(元兇), 김일성(본명 김성주)의 은인으로 알려져 있다. 김일성이 감옥에 갇혔을 때 손 목사가 일본 간수를 매수해 생명을 구해준 적이 있었다는 것.

    김일성의 모친 강반석의 친척과 함께 평양에서 목회를 했던 손정도 목사는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과는 숭실중학교 동창 사이였다.

    '어머니를 모시고 손정도 목사를 찾아가라'는 김형직의 유언을 듣고 길림에 살고 있던 손 목사를 찾아간 김일성은 그때부터 수년간 교회청년회 회장으로도 활동하는 등 독실한 신앙 생활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길림 육문중학교를 다녔던 김일성은 손원일 제독의 친동생 손원태(孫元泰)와 의형제처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훗날 손원태는 자신의 아내를 데리고 방북, 김일성과 독대를 해 큰 화제를 모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