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필요한 황교안, 미약한 친박… '부족한 사람'→'필요한 사람' 만드는 리더십 절실
  • 권력자에게 2인자의 존재는 늘 달콤한 유혹이다. 2인자는 권력자가 미처 살피지 못하는 다양한 분야에서 세세한 영향력을 미치게 한다. 권력자의 눈의 되고, 귀가 되고, 또 손이 된다.

    2인자의 가장 큰 매력은 호위무사 역할이다. 반대 세력과의 전투에서 1차 방어선을 구축한다. 이 방어선은 1인자의 피해를 최소화시킨다. 거듭된 전투 속에서도 1인자가 건재하다는 것은 곧 전쟁에서의 승리로 이어진다. 한신(韓信), 장량(張良) 등 역사를 창출한 세력에는 늘 뛰어난 2인자가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통치 철학 중 핵심은 '2인자는 없다'였다. 박 대통령이 2인자의 역할과 그 매력을 모르는 리더(君主)는 아닐테다. 자연스레 체득한 '2인자의 위험성'을 더 무겁게 여기기 때문일테다. 주군을 도와 천하를 통일했지만 나중에 황제 자리를 넘보는 모반 세력으로 찍혀 죽음을 당한 한신 같은 먼나라 얘기를 굳이 꺼낼 필요는 없어 보인다.

    감히 박 대통령의 2인자에 대한 경계심의 깊이를 짐작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래도 2인자는 필요하다.

  •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박근혜 대통령 ⓒ 뉴데일리 DB
    ▲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박근혜 대통령 ⓒ 뉴데일리 DB

    상처만 남은 이번 유승민 파문에서도 2인자의 부재는 뼈아팠다.

    유승민 파문 속에서 친박계 몇몇 의원들을 제외한 여당 의원들의 목소리는 한결 같았다. 총선을 10개월 앞둔 시점에서 당 지도부를 균열시킨 뒤, 대통령이 내놓는 대안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비박계 의원들은 "백번 양보해 김무성-유승민을 쫓아낸다고 하자. 그럼 총선을 누가 이끌거냐. 또 다음 대선은 어떻게 치를거냐. 친박계에서 그럴 대안을 가져나와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불만을 연일 쏟아냈다.

    상처가 덧나고 덧난 끝에 새누리당은 8일 오전 의총을 열어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 결의안을 의결키로 했다. 큰 변수가 생기지 않는한 유승민 퇴진은 현실화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후임 원내대표 선거에서도 친박계가 내밀 카드는 쉽게 윤곽이 잡히지 않는다.

    김무성 대표의 PK 지역은 고려하기 어렵다. 유승민 원내대표의 대구도 마뜩치 않고, TK의 또다른 맹주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복귀도 추경 정국인 현재로선 명분이 없다. 박 대통령은 7일 오전 회의에서 국무위원들에게 "개인적인 행로는 있을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TK를 제외하고 친박 성향이 강한 충청권에서 '대안'을 내놓으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이 역시 여의치 않다. '이완구 파문'이 아직 트라우마로 남아있는데다, 마땅한 친박 주자도 찾기 어렵다.

  • 국회법 개정안 재의가 진행된 6일 본회의에서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를 바라보고 있다. ⓒ 이종현 사진기자
    ▲ 국회법 개정안 재의가 진행된 6일 본회의에서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를 바라보고 있다. ⓒ 이종현 사진기자

    비박계가 요구하는 '대안론'을 떠나서라도 이번 유승민 파문에서 박 대통령이 떠안은 상처는 깊다.

    제 잘난 맛에 사는 국회의원 300명에게 깊던 얕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상당수 비박계 의원들은 대통령의 국정철학과 어긋난 유승민의 좌클릭 행보를 지적하면서도, 대통령이 직접 나서 여당 원내대표를 끌어내는 것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는다.

    끝끝내 의총을 열고, 유승민에 대한 사퇴 표결이 아닌 사퇴 결의안을 의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도 이에 대한 방증이다. 대통령이 끌어내는 것이 아닌 국회의원들 손으로 물러나게 하겠다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표방하겠다는 거다. 여의도 국회 귀족들이 끝까지 지키려는 꼴같지 않은 자존심이다.

    애초에 원내에 대통령의 의중을 강하게 전달할 '2인자'가 있었다면, 굳이 박 대통령이 전면에 나설 일도 없었다. 국가원수가 여당 원내대표와 마치 '감정싸움'을 하는 것 같은 모양새는 아쉬움을 남긴다.

    2인자는 굳이 1인(人)일 필요는 없다. 국회 원내에 하나, 내각에 하나, 비선에 하나. 권력자가 필요하다 판단하는 곳마다 배치하는 것은 권력을 쥔 자의 권한이다.

    다양한 분야에 분포해 있지만, 필요한 실권만 주는 2인자의 적절한 배치·운영은 권력자의 영역이다. 인사(人事)적인 이런 권력자의 능력은 2인자가 후계자 혹은 라이벌로 떠오르는 것을 막는다. 박 대통령이 경계하는 '2인자 부작용'을 차단할 수 있다.

  • 각 분야에 대통령의 의중을 강하게 어필할 충성스런 2인자가 없다는 점은 국정 하반기를 맞은 박근혜 정부가 풀어야 할 숙제다.

    천신만고 끝에 임명한 황교안 총리에 대한 기대는 크지만, 아직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안대희, 문창극 등 연이은 총리 후보자 낙마에서 빚어진 내부적인 상처가 아물 필요가 있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의 책사(策士)를 했던 이정현 의원도 아직 당에서의 파급력은 약하다. 유승민 사태 속에서 이정현 의원의 역할은 작지 않았지만, 종국에는 '명분'보다는 '의리'를 내세우는 감정적 호소에 머무른 건 아직 그가 가진 한계점이었다.

    예능계에서 10년 이상 장기 집권하는 유재석이라는 권력자 뒤에는 스스로 2인자를 자처하는 박명수라는 존재가 있다는 평가가 근래 여의도 저녁자리에서 회자된다. 악플을 달고 사는 동료, 뜸하다 싶으면 사고 치는 각양각색의 동료들을 꿋꿋하게 이끌어 나가는 유재석이기에 변덕이 심한 여론의 시기(猜忌)에서 오랫동안 비껴갔다는 얘기다. 반대로 제 아무리 '유느님'이라 불리는 유재석이라도 동료들의 협조와 호위무사 역할이 없었다면 장기집권은 어려웠을 것이라는 평가도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다음달이면 박근혜 정부 임기의 절반이 지난다. 총선은 8개월 앞으로 다가온다. 여의도 국회 귀족들이 더욱 발광(發狂)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국민들은 박 대통령이 앞으로 만들어갈 '정치개혁'을 목을 빼고 기다린다. 새누리당의 뼈를 깍는 혁신이든, 대통령의 탈당이든 방식은 박 대통령의 몫이다.

    하지만 대통령 주변에 충성스러운 2인자가 없다는 점은 마음에 걸린다. 국가 정치와 예능판을 비교할 순 없는 노릇이지만, 권력을 탐하는 날파리가 아닌 충신이 절실한 박근혜 대통령이다. 평균 이하의 '부족한 사람'도 '필요한 사람'으로 만드는 유재석의 리더십을 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