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서 각국 정상과 조우, 日 아베 총리와도 "한중일 외교장관회의 합의한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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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9년 리콴유 전 총리 방한 당시 악수를 나누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도 눈에 띈다. ⓒ청와대 제공
    ▲ 1979년 리콴유 전 총리 방한 당시 악수를 나누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도 눈에 띈다. ⓒ청와대 제공

     

    [싱가포르=오창균 기자]

    한국의 이승만(李承晩)-박정희(朴正熙),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과 함께 아시아의 근대화를 이끈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의 장례식이 29일 싱가포르 국립대학 문화센터 UCC에서 거행됐다.

    리 전 총리의 타계로 '아시아 근대화' 1세대 기수(旗手)들의 대장정이 막을 내리게 됐다. 하지만 아시아의 도약은 끝이 아니다. 이는 곧 2세대 지도자들이 날개를 펴게 되는 '모던 아시아(Modern Asia) 2.0 시대'의 서막을 의미하기도 한다.


    #. 오후 12시 20분(현지시간)

    화창하던 오전과는 달리 느닷없이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기에서 건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이처럼 갑작스럽게 폭우가 내리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라는 게 현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싱가포르 의사당에서 장례식장으로 이어지는 운구 행렬(15.4㎞ 구간)에는 수 만명의 시민들이 참석해 국부(國父)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리콴유"를 연호하던 일부 시민들은 왈칵 눈물을 쏟아내기도 했다.

    싱가포르 전국 18곳에 설치된 추모소에는 28일까지 150만명이 넘는 추모객이 찾았다. 싱가포르 전체 국민 중 4분의 1이 추모소를 찾은 것이다. 장례식은 국영 방송과 리 전 총리 추모 사이트 등을 통해 생중계되면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거주 싱가포르인도 추모 물결에 동참했다.


    #. 오후 12시 50분(현지시간)

    장례식장에 도착한 박근혜 대통령은 싱가포르 측 연락관의 안내를 받아 대학문화센터 1층 좌측 계단 옆에 있는 조문록에 서명했다. 이어 계단을 이용해 2층 장례식장으로 입장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조문록에 남긴 서명 문구는 다음과 같다.

    "Lee Kuan Yew was a monumental leader of our time. His name will remain forever engraved in the pages of world history. The Korean people join all of Singapore in mourning his loss. (리콴유는 우리 시대의 기념비적인 지도자였다. 그의 이름은 세계사의 페이지에 각인돼 영원히 남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싱가포르인과 그를 잃은 슬픔을 함께 할 것이다.)"

    이날 장례식에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리위안차오(李源潮) 중국 국가부주석, 토니 애벗 호주 총리, 러시아의 이고르 슈발로프 제1부총리, 영국 윌리엄 헤이그 보수당 하원대표, 레우벤 리블린 이스라엘 대통령 등 18개국 대표들이 참석했다.

     

  •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오후 싱가포 국립대학 문화센터에서 열린 리콴유 전 총리의 국가 장례식에 참석해 각국 정상들과 나란히 앉아 있다. ⓒ Courtesy of Singapore’s Ministry of Communications and Information(싱가포르 정보통신부)
    ▲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오후 싱가포 국립대학 문화센터에서 열린 리콴유 전 총리의 국가 장례식에 참석해 각국 정상들과 나란히 앉아 있다. ⓒ Courtesy of Singapore’s Ministry of Communications and Information(싱가포르 정보통신부)


     


    #. 오후 3시 10분(현지시간)

    박 대통령은 이어 2층 장례식장에 입장하면서 인근에 자리한 데이비드 존스톤 캐나다 총독, 제리 메이트파레 뉴질랜드 총독과 인사를 나눴다. 양 옆에 앉은 레우벤 리블린 이스라엘 대통령, 떼인 세인 미얀마 대통령과도 환담을 가졌다.

    이목이 쏠렸던 한일(韓日) 정상의 조우는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의 아베 총리는 박 대통령과 한참 떨어진 우측 끝 쪽에 자리를 잡았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현재까지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조우하거나 환담을 나누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고 전했다.

    하지만 장례식 종료 후 싱가포르의 토니 탄 대통령 주재로 30여분 간 진행되는 리셉션에서 한-일 양국 정상이 만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박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대화를 나눌 경우 어떤 주제를 다룰지도 초미의 관심사다.


    #. 먼저 찾아온 아베, 한일 정상 조우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일본 총리는 장례식 이후 열린 토니 탄 싱가포르 대통령 주최 리셉션장에서 결국 만났다.

    박 대통령을 먼저 찾아온 아베 총리는 "최근 있었던 3국 외교장관회의의 성공적인 개최에 감사드린다"며 "의장국으로서의 역할을 해주신 것을 높게 평가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이에 "(한중일) 3국 외교장관회의에서 합의한 대로 앞으로 필요한 조치를 잘 취해가자"고 당부했다고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박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언급한 3국 외교장관회의란 지난 21일 윤병세 외교부 장관을 비롯한 한중일 3국 외교장관이 서울에서 만나 제 7차 외교장관 회의를 열고 논의한 내용을 말한다.

    당시 회의에서 윤 장관과 왕이 중국 외교부장,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은 '한중일 정상회의 조기 개최를 위해 노력하자'고 합의한 바 있다.

    박 대통령 역시 3국 외교장관을 청와대로 초청해 "3국 협력관계가 보다 탄탄하게 발전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시기와 내용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았지만 한일 양국 정상이 다시금 '합의'에 대해 언급하면서 한중일 정상회담 가능성에 청신호가 들어온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박 대통령은 이날 리셉션장에서 리 위안차호 중국 부주석과도 만나 우리나라의 AIIB(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참여 배경을 설명하며 "앞으로 AIIB 성공을 위해 잘 협의해 나가자"고 했다.

    이에 리 부주석도 "한중 FTA 가서명을 축하하며 앞으로 AIIB와 관련해 긴밀한 협력을 하자"고 화답했다.


  • 지난 21일 박근혜 대통령이 한중일 3국 외교장관을 초청해 환담을 나누고 있다. ⓒ 뉴데일리 DB
    ▲ 지난 21일 박근혜 대통령이 한중일 3국 외교장관을 초청해 환담을 나누고 있다. ⓒ 뉴데일리 DB

    박 대통령은 지난 21일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상을 접견한 자리에서 한-중-일 3국 협력관계 복원을 강조한 바 있다. 아베 총리도 최근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인신매매의 희생자'라고 최초로 표현했다.

     

  •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오후 싱가포 국립대학 문화센터에서 열린 리콴유 전 총리의 국가 장례식에 참석하고 있다. ⓒ Courtesy of Singapore’s Ministry of Communications and Information(싱가포르 정보통신부)
    ▲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오후 싱가포 국립대학 문화센터에서 열린 리콴유 전 총리의 국가 장례식에 참석하고 있다. ⓒ Courtesy of Singapore’s Ministry of Communications and Information(싱가포르 정보통신부)


     

    한국과 일본은 명실공히 '모던 아시아(Modern Asia) 2.0 시대'의 중심 국가다. 1세대 지도자들이 이뤄놓은 대업을 그르칠 수 없다. 서구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본질을 찾겠다며 진통할 때, 아시아는 각고의 노력을 통해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지금은 1세대를 뛰어넘는 결단과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제 2세대 지도자들이 양보와 타협을 할 차례다.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이한 뜻 깊은 해다. 한-일 관계가 과거사 문제로 장기 경색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이번 리콴유 전 총리의 국장(國葬) 참석을 계기로 양국이 관계개선 모멘텀을 확보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