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촛불시위 폭도들, 6.25사진 불태우고 "이 새끼(이승만) 때문에 통일안돼"마리너스 수사 장례미사서 '흥남철수' 듣고 충격..역사 바로 알리기 운동 시작안재철 이사장 "北주민 모두가 해방되는 그날까지 '생명의 항해' 계속 되길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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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진호 전투는 한국에서는 흥남철수의 배경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美해병대에는 가장 고전한 전투로 유명하다. 사진은 장진호 전투 당시 얼어죽은 美해병대 장병들 시신.  ⓒ 6.25전쟁 종전 60주년 기념 블로그
    ▲ 장진호 전투는 한국에서는 흥남철수의 배경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美해병대에는 가장 고전한 전투로 유명하다. 사진은 장진호 전투 당시 얼어죽은 美해병대 장병들 시신. ⓒ 6.25전쟁 종전 60주년 기념 블로그

    올 한 해 한국 영화의 가장 큰 화제거리는 단연 '국제시장'이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덕수'라는 인물의 시선으로 조망함으로써 '아버지 세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킨 이 영화는 불과 60여일 만에 누적관객 1,400만을 돌파하는 대기록으로 상반기 극장가를 휩쓸었다. 개봉 11주차에도 여전히 식을 줄 모르는 흥행세를 과시 중인 '국제시장'은 역대 최고 흥행작으로 꼽히는 '명량'을 마지막 목표로 삼고 있다.

    '국제시장'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그동안 관심 밖의 대상이었던 각종 사회적 이슈들도 덩달아 재조명되는 분위기다. 특히 영화 초반 분위기를 압도한 '흥남철수작전' 신은 관객들의 뇌리에 잊혀지지 않는 명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흥남 철수 작전'은 1950년 12월 한반도 북동부 흥남항에서 진행된 대규모 탈북 작전을 일컫는다. 기록에 따르면 이때 10만명 이상의 유엔군과 35만톤 이상의 군수물자가 성공적인 철수를 했을 뿐 아니라, 10만명에 가까운 북한 피란민까지 무사히 생명을 건진 것으로 전해졌다.

    영화 속에선 CG작업으로 수많은 인파를 덧입혀서 사람들이 파도처럼 몰려들던 흥남 부둣가를 완벽하게 재현했다.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는 부둣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뒤엉켜 바닷속으로 뛰어드는 장면은 국내 영화사에 길이 남을 최고의 신이라는 평가다. 제작진은 동생의 손을 답고 부둣가로 달려가는 어린 덕수의 시선을 통해 관객들에게 마치 전쟁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긴장감을 선사했다.

    그런데 만일 '흥남 철수 작전'이 실패해 유엔군과 피란민 10만명이 도륙 당하고 각종 물자 35만톤이 파괴됐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1951년 1월부터 전개된 미군의 대대적인 반격이나 '제2차 서울수복'을 가져온 '리퍼작전(Operation Ripper)'은 역사책에 등장하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지만 영화 '국제시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실제로는 '다른 결단'을 내렸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는 인물들이었다면, 대한민국의 현재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 됐을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이 남자'가 한 수도사의 '장례미사'에 참석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흥남 철수 작전'에 대해 무지한 채로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흥남부두에 모인 수만명의 피란민들이 정박해 있는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 호에 타려고 몸부림을 치는 '국제시장'의 첫 장면이 송두리째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 집사람이 성당에서 성가대장을 할 때였어요. 갑자기 마리너스 수사님 장례미사에 같이 가자는 겁니다. 당시는 아내가 고속도로 운전을 안 할 때라 제가 같이 동행하게 된 거죠. 저는 흥남철수 얘기를 그때 처음 들었습니다. 2001년 당시 저는 무역 관련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요. 제가 공부한 전공과 하는 일은 역사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죠.


    안재철(60) 월드피스자유연합 이사장은 "2001년 아내의 권유로 우연히 참석한 한 장례미사에서 마리너스 수사와 흥남철수작전에 대한 얘기를 듣고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웠다"며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에 대해 미국인보다도 더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자괴감에 빠졌었다"고 밝혔다.

    평소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대학 시절 제일 재미있게 들었던 과목도 모 수녀님이 가르치신 종교역사개관이었어요. 해서 나름대로 한국사나 동양사, 서양사 등에 박식하다고 자부하고 있었죠. 그런데 마리너스 수사님 장례미사에서 흥남철수작전에 대한 얘기를 듣고는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역사를 많이 안다고 자부했던 제가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에 대해선 너무 모르고 있었던 거죠. 옛날 얘기만 백날 해서 무엇하나? 우리와 피부로 맞닿아 있는 근현대사를 먼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그때부터 든 겁니다.


    이날 미사의 주인공인 故 마리너스(Marinus) 수사의 본명은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 1950년 12월 흥남부두에서 피란민 1만 4,000명을 태우고 거제도로 향했던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 호의 선장, 레너드 라루가 바로 이날 장례 미사의 주인공이었다.

    이 분의 '기적적인 생애'를 접하게 되면서, 인생의 참 의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어떻게 사는 게 보람된 삶일까' '어떻게 인생을 정리하면 자녀들에게 본이 될까'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식이었죠. 결론은 '역사를 바로 알리자'는 거 였어요. 처음엔 마리너스 수사님의 행적을 좇아 가다 흥남철수작전을 살펴보기 시작했고, 이 긴박한 탈출이 장진호 전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되면서 6.25전쟁 전반에 대해 조사를 하게 됐습니다.


    마리너스 수사와 선원들의 인도주의적인 업적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고 결심한 안재철 이사장은 평소 관심에도 없던 한국전쟁을 공부하고 각종 전사(戰史)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구조 일화를 기록한 '기적의 배'라는 책이 있다는 사실을 듣고, 이를 가져다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도 맡았다.



  • 안재철 이사장은 "제가 이 책을 번역하고, 국내에 널리 소개한 장본인은 맞지만, 솔직히 내용 중 사실과 다르게 적힌 부분이 많아, 약 40%는 (자신이)수정하거나 덧붙인 내용들이 들어가 있다"고 밝혔다.

    이런 것을 평역(評譯)이라고 부르지요. 원본이 하도 부실해서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사무장을 맡았던 로버트 러니(J. Robert Lunney)씨에게 부탁, 사실과 다르게 묘사된 부분들을 대거 손질했습니다. 1950년 당시 22살의 러니씨는 코넬대 법과대학원에 갈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전쟁터에 가는 위험한 일을 자청했던 분입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생존 선원으로서 과거 흥남철수작전에 대해 많은 증언을 해주신 분이죠.


    안재철 이사장은 "'국제시장'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흥남철수작전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마련됐지만, 자신에게 걸려오는 전화가 온통 '마리너스의 기적의 배(Ship of Miracle)'를 찾는 전화"라며 허탈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하하. 영화 '국제시장'에 흥남철수작전이 등장하고, 뉴데일리에서 '기적의 배'란 책을 자세히 소개해 주셔서,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고 싶어 하시는 것 같더군요. 그런데 원본에 오류가 너무 많았어요. 일단 상당 부분을 손질해 국내에 소개하긴 했지만, '흥남철수작전'을 제대로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별도로 '생명의 항해'란 2권짜리 책을 내게 된 겁니다.


    번역 작업을 하다 수소문 끝에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생존선원인 로버트 러니를 만나게 된 안재철 이사장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자문을 받는 것은 물론, 아예 로버트 러니를 국내로 초청해 '흥남철수작전'의 실화를 직접 들어보는 감개무량한 행사를 기획하기도 했다.

    러니씨는 그동안 흥남철수작전에 대한 많은 자료를 모아 온 자신이 '2대 캡틴'이라고 자부해 왔는데, 자기가 죽으면 먼지 속으로 다 없어질 자료들을 세상에 드러내 빛으로 끌어준 저(안재철)를 '3대 캡틴', 즉 '캡틴 오브 스토리(Captain of Story)'라고 부르고 싶다고 하더군요. 흥남철수에서 있었던 휴머니즘을 알리고, 지금도 독재와 억압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을 구원해야 한다는 제 신념이 감동적이라면서요. 러니씨는 저에게 "북한 주민 모두가 자유로운 세상에서 사람답게 살수 있는 그 날이 올때까지 제가 운항하는 생명의 항해가 지속되기를 바란다"고 기원해 주셨습니다.

  • 6.25전쟁중이던 1950년 당시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상급선원으로 피난민 1만4천여명을 구해낸 '흥남철수 작전'을 수행했던 로버트 러니.   ⓒ 연합뉴스
    ▲ 6.25전쟁중이던 1950년 당시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상급선원으로 피난민 1만4천여명을 구해낸 '흥남철수 작전'을 수행했던 로버트 러니. ⓒ 연합뉴스

    당시의 인연을 바탕으로 안재철 이사장은 로버트 러니를 통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유품'을 건네 받는 행운까지 얻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허무하게 사라졌지만 다행스럽게도 배의 부속품 중 몇 가지가 유품으로 미국 해운청의 수산 베이 예비선단에 보관돼 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저희가 향후 건립할 '월드피스 밀레니엄파크' 기념관에 전시하기로 약속이 돼 있어요. 저희가 '흥남철수작전'의 의미를 알리는 활동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해운청의 선단 관리 책임자로부터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유품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1945년 7월 24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건조돼 일생을 시작했다.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에 참여, 1만 4천명의 북한 피란민을 구출하는 진기록을 세운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1966년 8월 22일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1970년 1월 30일 캘리포니아주 수산 베이 예비선단으로 들어갔다. 1971년 3월 11일 현역에서 완전히 은퇴한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1993년 8월 9일 워싱톤 주에 있던 첸코 인터내셔날에 미화 33만 5,900달러로 판매됐다. 이후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중국에서 고철로 분해되는 과정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안재철 이사장은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진정한 유품은 우리들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생명을 중시하는 '헌신'이 아닐까 싶다"며 "자신들의 목숨마저도 위태로운 상황에 인명 구출에 소홀함이 없었던 구조 대원들의 '인류애(人類愛)'야말로 메러디스 빅토리 호가 남긴 진짜 유산"이라고 강조했다.

  •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에 참가한 '메러디스 빅토리호.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세계 최대 규모의 구조작전을 성공시킨 배로 인정돼 지난 2004년 기네스북에 올랐지만 이미 1993년에 고철용으로 중국에 판매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중에서
    ▲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에 참가한 '메러디스 빅토리호.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세계 최대 규모의 구조작전을 성공시킨 배로 인정돼 지난 2004년 기네스북에 올랐지만 이미 1993년에 고철용으로 중국에 판매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중에서



    안재철 이사장은 자신이 펴낸 '생명의 항해'에 담긴 '또 하나의 보물'도 공개했다. 다름아닌 미국 국방성에서 비밀 해제된 9건의 기밀 서류를 입수, 1950년 12월 8일부터 "북한 피란민들을 구출하라"는 상부 명령이 떨어진 사실을 밝혀낸 것.

    맥아더 장군은 이미 12월 8~9일에 군단을 철수시키고 사람들을 대피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제가 미국 국방성에서 비밀 해제된 흥남철수 당시의 10군단 사령부 지휘 보고서와, 10군단 사령부와 유엔군 사령부 간의 무선통신 전문 등 9개 문서를 일일이 확인해 알게 된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해 영화(국제시장) 속에 맥아더가 나오면 흥행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등장시키지 않았다는 우스갯 소리도 있더군요.


    안재철 이사장은 "'국제시장'에는 미군들이 처음엔 피란민들을 구하지 않으려 했다가 현봉학 박사 등이 간청을 하자, 마지못해 피란민들을 배에 태우는 것처럼 나오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며 "미군은 처음부터 흥남에서 피란민들을 철수시키기로 결정을 한 상태였고, 애당초 피란민을 실을 배에는 무기도 싣지 못하도록 했다"고 덧붙였다.

    10만명이라는 많은 인파를 구출한 사건입니다. 어떻게 이런 중대한 결정을 현장에서 즉석으로 내릴 수 있겠습니까? 만일 전쟁 한 복판에서 이런 결정을, 특히 무기를 바닷 속에 버리라는 결정을 실제로 내렸다면 그 사람은 총살감입니다.


    게다가 안재철 이사장이 공개한 문건에 따르면 북한 피란민을 돕기로 결정한 것은 미군 뿐만이 아니었다. 북한의 침략을 받은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도 "이들의 생명을 구하고 북한 피란민들을 수송해 줄 것"을 유엔군 측에 요청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것.

    1950년 12월 14일 미 10군단 사령관 측이 일본 도쿄에 있는 극동군 사령관 측에 보낸 무선통신 내역을 보면 함흥시 대표자들이 미 보병 3사단 측에 피란민 구출을 요청한 사실이 나오는데요. 이들이 떠나고 나서 한 통역관은 "통역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받은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애국자들의 생명을 구하고 피란민들을 수송해 줄 것을 유엔군을 방문해 부탁해 보라"고 이승만 대통령이 이야기했다는 것입니다.

  • 안재철 이사장이 단독으로 입수한 극동군 사령부 수신메시지(1950년 12월 14일).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중에서
    ▲ 안재철 이사장이 단독으로 입수한 극동군 사령부 수신메시지(1950년 12월 14일).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중에서

    이 문건에는 흥남 일대 북한 주민들이 기를 쓰고 미군과 탈출하려고 했던 '진짜 이유'도 담겨 있다. 일각에선 당시 미국의 핵폭탄 투하를 염려한 주민들이 흥남항으로 도피했다는 루머를 제기하기도 했으나, 실상은 "공산치하에 시달리던 주민들이 모두가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도피를 감행했다"는 것이다. 이는 미군을 찾아온 함흥시 부시장과 함경남도 의장 등이 직접 밝힌 내용이다.

    공산치하에서 6년 동안이나 압제를 받아온 이들 주민은 유엔군을 따라 떠나고 싶어합니다. 피란을 떠나지 못하면 공산군들이 여자나 아이들을 포함해 그들 모두를 죽일까 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흥남으로 가려고 애쓰고 있으며 모두가 죽임을 당하기 전에 유엔군을 따라 피란갈 수 있는 해상 운송편이 제공되기를 원하거나, 혹은 유엔군이 함흥에 남아 자신들의 생명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해줄 것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중에서


    안재철 이사장은 '생명의 항해'란 책 외에도 '6.25한국전쟁과 대한민국의 꿈'이란 사진집을 펴 내기도 했다. 미국 국립자료보관청이나 국방성, 해군성 자료실에서 자료를 받아 6.25전쟁 당시의 사진 1,150여장과 지도 27장을 포함하는 방대한 분량의 사진을 확보한 안 이사장은 국내에서 최근까지 4,000회 정도 노상 전시회를 열었다.

    6.25전쟁이 객관적으로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난 2012년에 한글과 영문판으로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이라는 사진집을 발간했습니다. 동해(East Sea)와 독도(Dok Do)를 정확히 전 세계인에게 알리고, 만주와 연해주가 예전에는 우리의 영토였음을 알리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라 자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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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년 6월 27일 새벽 무렵 '6.25 사진전' 작품들이 전시된 청계광장에 촛불 폭도들이 몰려와 관련 사진들을 몽땅 불태운 모습. 당시 안재철 월드피스자유연합 이사장은 "6.25전쟁 58주년이 되는 25일 밤부터 시위대 수십여 명이 갑자기 몰려와, 사진들을 발로 차고 손으로 찢어 35점의 사진을 훼손했다"고 밝혔다. 특히 "이들은 전시된 사진 중 이승만 대통령과 트루먼 대통령 사진을 포함한 90여점의 사진을 조선일보 사옥 앞 도로로 가져와 '화형식'을 치렀다"고 증언했다.  ⓒ 월드피스자유연합 / 연합뉴스
    ▲ 2008년 6월 27일 새벽 무렵 '6.25 사진전' 작품들이 전시된 청계광장에 촛불 폭도들이 몰려와 관련 사진들을 몽땅 불태운 모습. 당시 안재철 월드피스자유연합 이사장은 "6.25전쟁 58주년이 되는 25일 밤부터 시위대 수십여 명이 갑자기 몰려와, 사진들을 발로 차고 손으로 찢어 35점의 사진을 훼손했다"고 밝혔다. 특히 "이들은 전시된 사진 중 이승만 대통령과 트루먼 대통령 사진을 포함한 90여점의 사진을 조선일보 사옥 앞 도로로 가져와 '화형식'을 치렀다"고 증언했다. ⓒ 월드피스자유연합 / 연합뉴스

    그런데 애국심 하나로 도심 한복판에서 무료 전시회를 열던 안재철 이사장은 2008년 여름 서울 청계광장에서 촛불 시위대에 의해 사진이 모두 불태워지거나 훼손당하는 악몽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촛불시위 하시던 분들이 우리가 전시한 사진들을 불태울때 처음 깨달았어요. 우리나라에 이렇게 폭동 세력이 많은 줄은 미처 몰랐죠. 낮에 시위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신사적이었거든요. 비가 오던 어떤 날은 어린 애를 데리고 나온 한 여성 분이 우산을 말아서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의 사진 속 눈을 마구 찌르는 장면을 목격한 일이 있어요.


    "당시 청계광장에 매일 같이 나와 사진전을 열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그때 상황을 소상히 알고 있다"고 밝힌 안 이사장은 "어떤 여성은 우산 끝으로 이승만 사진의 눈을 찌르기도 했고, 시위대 속에서 '김정일 장군, 김일성 수령 만세'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 적도 있다"고 증언했다.

    저는 지금도 이 여성 분이 내뱉은 말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이 새끼 때문에 통일이 안됐다." 그날 밤이었어요. 시위대 속에서 "김정일 장군, 김일성 수령 만세"라고 외치는 소리가 아주 많이 들렸죠. 그때 저희는 그 장소에 매일 있었어요. 그야말로 역사의 산 증인이죠. 저희가 당시 보고 느꼈던 것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안재철 이사장은 "거리 사진전을 진행하면서 자꾸만 전시회를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어 중구청 담당자에게 물어보니 '국정감사에서 우리가 하는 전시회가 도마 위에 올랐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고 밝혔다.

    거리 사진전을 진행하면서 자꾸만 전시회를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모든 과정에 제약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엔 중구청 담당자에게 솔직히 물어봤어요. 대체 누가 전시회를 막고 있느냐고. 그랬더니 국정감사에서 우리가 하는 전시회가 도마 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서울시 국정감사였는데, 새정치연합 장하나 의원이 이 얘기를 꺼냈다고 하더군요.

  • 안재철 이사장은 "우연한 계기로 이런 일에 뛰어들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미션이란 생각이 들었다"며 "지금도 대한민국을 태어나선 안될 나라로 치부하는 세력이 있는 것을 보면 분통이 터진다"고 말했다.

    그들은 한반도가 공산화 돼서 사람들이 다 굶어죽어야 만족할 사람들입니다. 만일 그때 우리가 북한에 점령 당했다면 지금의 부와 번영을 누릴 수가 있었을까요?


    안재철 이사장은 "북한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해방시키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통일이요, 대박이 아닌가 싶다"면서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광복을 맞은지 70주년이 되는 해, '통일의 염원'을 담은 아주 특별한 기획을 구상 중"이라는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전쟁통에 찍힌 다양한 사진 속에서 잃어버린 우리 이웃, 잃어버린 부모님 등을 찾는 대국민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거죠. 실제로 저희가 전시한 사진을 보신 한 노신사께서 "당시 공군회관 자리에 있던 남부훈육소 사진"이라는 제보를 해주시기도 했고, 우연히 피아니스트 한동일씨가 찍힌 사진을 수집한 뒤 나중에 사진 속 주인공을 발견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진들을 함께 공유하고 호흡하면서 나라에 대한 소중함과 함께 진정한 애국애족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 - 미국에는 언제 건너 간 겁니까?

    ▲서강대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 83년에 함께 미국으로 건너 갔어요. 미네소타 주립 대학교에 동반 유학을 간 거죠. 와이프는 컴퓨터 전공을 했고요. 저는 경영학 석사를 마치고 병원행정 박사 과정을 밟다가 사업 쪽으로 빠졌죠. 아내가 벨 연구소(Bell Laboratories)에 취직이 된 이후로 저희 가족은 줄곧 뉴저지에서 살고 있습니다.

    - 마리너스 수사에 대한 이야기는 그로부터 한참 후에 들으신 거죠?

    ▲제가 라루 선장님 장례 미사에 참석한 게 2001년도입니다. 그때 수도원에 갔다가 처음 이같은 역사적인 사건을 알게 된 거죠.

    - 약력을 훑어보니 미국 대통령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셨던데.

    ▲공화당 전국하원위원회 산하 경제자문위원회 명예의장, 대통령 자문위원, 공화당 상원협의회자문위원 등을 지냈는데요. 보통 미국에서 기업 활동을 하다보면 이런 제안이 많이 들어옵니다. 일종의 후원회 활동을 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 거처는 미국에 있는데, 한국에서 이런 사업을 벌이기가 쉽진 않았을텐데요?

    ▲제가 흥남철수작전에 관심을 갖고, 집필을 하거나 6.25 관련 사진들을 모으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초반부터지만, '월드피스자유연합'이란 사단 법인을 낸 것은 2010년도입니다. 처음엔 비자 문제로 미국과 한국을 자주 왔다갔다했었는데요. 2013년부터 본격적으로 국내에 머물며 관련 업무를 진행했습니다. 근데 재입국 비자를 받는 과정이 참 번거롭더라고요. 그래서 영주권은 2년 전에 포기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진짜 즐거운 마음으로 일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제가 하는 일처럼 보람되고 신나는 일이 어디있을까 생각합니다.

    - 영화 '국제시장'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흥남철수작전을 널리 알려오신 안재철 이사장님도 덩달아 유명세를 타시는 것 같습니다.

    ▲전화 오는 게 전부 '마리너스의 기적의 배(Ship of Miracle)'를 찾는 전화예요. 하하. 영화 '국제시장'에 흥남철수작전이 등장하고, 뉴데일리에서 '기적의 배'란 책을 자세히 소개해 주셔서,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고 싶어 하시는 것 같더군요. 그런데요. 이 책을 제가 번역하고, 국내에 널리 소개한 장본인은 맞지만, 솔직히 내용 중 사실과 다르게 적힌 부분이 많아서요. 한 40%는 제가 수정하거나 덧붙인 내용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평역(評譯)이라고 부르지요. 원본이 하도 부실해서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사무장을 맡았던 로버트 러니(J. Robert Lunney)씨에게 부탁, 사실과 다르게 묘사된 부분들을 대거 손질했습니다. 당시 22살의 러니씨는 코넬대 법과대학원에 갈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전쟁터에 가는 위험한 일을 자청했던 분입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생존 선원으로서 과거 흥남철수작전에 대해 많은 증언을 해주신 분이죠.

    저와는 2001년부터 인연을 맺기 시작했는데요. 제가 미국 뉴욕주 변호사로 활동 중인 이 분을 모셔다가 우석대에서 명예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도록 도와 드렸어요. 당시 지금의 박근혜 대통령도 만나뵀었는데요. 그때 러니씨에게 직접 "한국 사람들을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마 이번에 국제시장을 관람하시면서 감회가 남다르셨을 거예요.



  • - 한국에 장기간 머물고 계시다면, 따로 거처가 있는 겁니까?

    ▲저는 주로 찜질방에서 거주를 합니다. 하하. 그렇다고 노숙자는 절대 아니에요. 오피스텔에 있다가 월세가 오르면 잠시 나왔다가 다른 곳으로 옮기는 식으로 살고 있어요. 제가 한국에 나와서 한 30억 정도를 지출한 것 같은데요. 그 중에 절반은 제 개인 재산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주 아껴가며 생활하고 있어요. 뭐 수중에 가진 게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 자연히 근검절약이 몸에 배더라고요. 솔직히 동가식 서가숙하는 건 맞고요. 그래도 어제 밤에는 제대로 잤습니다. 사우나에서…. 하하. 형님들이 한국에 다 계시긴 한데, 제가 일부러 찾아가진 않아요.

    -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이라는 두꺼운 사진집도 내셨던데, 이 책에 대한 소개도 좀 해주실까요?

    ▲6.25전쟁이 객관적으로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난 2012년에 한글과 영문판으로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이라는 사진집을 발간했습니다. 6.25전쟁 당시의 사진 1,150여장과 지도 27장을 포함하는 방대한 분량의 자료를 담아냈습니다. 6.25전쟁 뿐 아니라 동해(East Sea)와 독도(Dok Do)를 정확히 전 세계인에게 알리고, 만주와 연해주가 예전에는 우리의 영토였음을 알리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라 자부합니다. 이 사진들을 토대로 지금까지 약 4,000회 정도 노상 전시를 한국에서 했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태국 순방할 때에는 저희가 직접 태국 현지로 사진들을 공수해와 전시회를 가진 적도 있어요.

  • 6.25전쟁 기간 중 포항에서 유일하게 파괴되지 않아 임시 학교로 사용되고 있던 장로교회인 포항제일교회 앞에서 미 해병 윌리암 나롤 상병이 동생을 업고 있는 어린 소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안재철 저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중에서
    ▲ 6.25전쟁 기간 중 포항에서 유일하게 파괴되지 않아 임시 학교로 사용되고 있던 장로교회인 포항제일교회 앞에서 미 해병 윌리암 나롤 상병이 동생을 업고 있는 어린 소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안재철 저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중에서



    - 얼핏봐도 상당히 진귀한 사진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 표지 사진이 어떤 장소인지 알아보시겠습니까? 바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어머니께서 다니셨던 포항 소재의 교회입니다. 애당초 미군들이 이 사진을 기록할 때에는 "한국에 있는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되고, 이 건물 하나만 남아서 지금은 학교로 쓰이고 있다"라는 간단한 설명만 달아놨습니다. 그런데 오래 전 이명박 전 대통령과 중고등학교를 같이 다니셨던 한 교회 장로님께서 "여기가 바로 내가 다녔던 교회"라고 알려주셔서 알게 된 거죠.

    아쉽게도 이 책에는 담지 못했지만 제가 갖고 있는 사진 중에는 이영복 간호사와 통역관, 미군들이 나란히 서 있는 사진도 있습니다. 이 장면은 당시 미군들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큰 도움을 줬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진이죠. 흥남철수작전 이후 거제도에는 피란민들이 많이 살게 됐는데요. 미군들이 최초로 그곳에 의료진을 파견합니다. 전쟁이나 재해로 피란민들이 발생하게 되면 집단 전염병이 돌기 마련인데요. 당시 미군은 전쟁 지원 뿐 아니라 이런 의료 지원까지 아끼지 않는 참다운 기독교 정신을 실천했습니다.

    저는 전투를 벌이는 전쟁 사진보다 고아원이나 학교 사진들을 많이 수집했습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태어난 대한민국, 전 국민이 똘똘 뭉쳐 일어난 대한민국처럼 열심히 일하면 누구나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과 비전을 제시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집 타이틀을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이라고 지은 거죠.

    참, 조선일보와 관련된 사진들도 어렵게 입수를 했는데요. 다음 개정판 때에는 꼭 집어 넣을 생각입니다. 당시 미 7사단 신문을 조선일보에서 찍었었는데요. 신문사 직원들이 윤전기로 인쇄를 하는 현장을 촬영한 게 몇 장 있더라고요.

  • 1953년 1월 9일 당시 조선일보 영어 인쇄 시설에서, 미 육군 7사단 발행 신문인 ‘창검(Bayonet)’ 편집 협의를 하는 김종진 조선일보 영어 인쇄 시설 책임자(사진 왼쪽)와 하워드 제니스 하사(오른쪽), 한국인 디자이너(가운데, 성명 미상).   ⓒ 월드피스자유연합
    ▲ 1953년 1월 9일 당시 조선일보 영어 인쇄 시설에서, 미 육군 7사단 발행 신문인 ‘창검(Bayonet)’ 편집 협의를 하는 김종진 조선일보 영어 인쇄 시설 책임자(사진 왼쪽)와 하워드 제니스 하사(오른쪽), 한국인 디자이너(가운데, 성명 미상). ⓒ 월드피스자유연합
     
  • 1953년 1월 9일 당시 조선일보에서 인쇄하는 미 육군 7사단 영어신문인 ‘창검(Bayonet)’의 1면을 인쇄하기 위해 아연 합금을 주물 통에 붓고 있는 조선일보 인쇄 기술자.   ⓒ 월드피스자유연합
    ▲ 1953년 1월 9일 당시 조선일보에서 인쇄하는 미 육군 7사단 영어신문인 ‘창검(Bayonet)’의 1면을 인쇄하기 위해 아연 합금을 주물 통에 붓고 있는 조선일보 인쇄 기술자. ⓒ 월드피스자유연합

    - 맞습니다. 조선일보 창업주인 방응모씨의 집이 원래 의정부에 있었는데요. 그 뒤로 논밭이 크게 조성돼 있었어요. 방응모씨는 나중에 6.25때 북한에 납북되셨죠. 그때 방응모씨 측에서 미군부대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해당 농지를 임대해 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곳에 미군 부대가 위치해 있어요. 그건 그렇고, 현재까지 모으신 사진이 약 몇 장 정도 됩니까?

    ▲해방 이후 6.25전쟁 때까지 찍은 사진들이 한 5만여장 있습니다. 대부분 미국 국립자료보관청이나 국방성, 해군성 자료실에서 디지털 복사를 한 사진입니다. 이 사진들을 얻느라 돈을 꽤 많이 없앴죠.    



  • - 예전 촛불 시위 때 사진들이 훼손되는 사건이 있었다면서요?

    ▲2008년 6월 서울 청계광장에서 사진전을 개최하던 중 촛불 시위대에 의해 사진이 모두 불태워지거나 일부 극단주의자들에게 사진을 훼손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도 사진이 훼손당하거나 국기가 꺾여지는 수난을 당하는 숱한 사건들이 있었죠.

    - 이사장님께서 기네스북 본사에 직접 신청해 몇 가지 의미있는 기록을 공인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제가 두 가지의 기네스북 기록을 등재한 사람입니다. 이게 다 전 세계인들이 6.25전쟁에 대한 관심을 갖게끔 계획한 일이지요. 이제는 많이들 아실텐데, 제가 러니씨와 함께 흥남철수작전 당시 미국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가 1만 4천명을 구출한 것은 '한 척의 배로 가장 많은 생명을 구출한 최고 기록'이라는 것을 영국 기네스북 본사에서 공인받은 바 있습니다.

    또 6.25전쟁 당시 세계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단일 연합군으로 참전했다는 내역도, 제가 직접 조사·발굴해 알려진 케이스죠. 세계 동계전투 사상 가장 치열했던 장진호 전투와, 인류 역사상 가장 빛나는 인도주의적인 생명구출작전인 흥남철수작전에 대해 깊이 연구를 하던 중, 당시 대한민국을 도와주려고 나섰던 나라가 무려 67개국이나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같은 기록은 미국 국립자료보관청과 유엔본부 등에 고스란히 보관돼 있었습니다.

    당시 전 세계에 독립국이 90여개국에 불과했으니 공산 국가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나라가 우리나라를 지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이와 관련해 저희 월드피스자유연합에선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도와준 67개국의 '대사관 국제기구'를 만들자는 제안을 외교부에 해 놓은 상태입니다. 그동안 제가 뱉은 말 중에 하나도 이뤄지지 않은 게 없거든요. 그래서 전 이번 사업도 반드시 실현된다고 확신합니다.

    - 말씀하신대로 6.25전쟁은 그 당시 나라다운 나라에선 모조리 다 참전한 전쟁이었습니다. 어느 전쟁보다도 참전국이 많은 '세계전쟁'이었다고 생각되는데요. 그런데 왜 미국에선 6.25전쟁을 3차 대전이라고 명명하지 않고,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 내지는 '알려지지 않은 전쟁(The Unknown War)'으로 취급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미국에선 6.25전쟁이 '휴전'으로 중단되면서, '결과적으로 졌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학술적으로는 전장(戰場)이 한반도 내에서만 이뤄졌기 때문에, 지리적인 이유로 '세계 대전'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만약 미군의 참전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겁니다. 타지에서 목숨 걸고 싸워준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으면 안되겠죠. 하지만 6.25전쟁에 대한 무관심과 전쟁 후유증으로 쓸쓸히 죽어간 참전 군인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2011년 하와이에서 6.25 사진전을 연 적이 있는데요. 그때 제가 미국 장성들 앞에서 "6.25전쟁이야말로 미국이 참전해서 이긴 가장 큰 전쟁이다. 오늘날 한국과 북한의 모습을 봐라. 당신네 나라가 도와준 나라가 이렇게 발전한 모습을 보면, 누가 승자인지 확실히 알 수 있지 않은가"라고 말했더니 다들 감격스러워 하더군요.

    - 문득, 궁금한 대목이 떠올라 여쭤봅니다. 지금까지 여러 권의 책을 내셨는데, 총 몇 권 정도 팔렸는지 집계는 해보셨습니까?

    ▲제일 많이 판 책이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작전'의 비화를 그린 '생명의 항해'인데요. 한 1백여권 팔린 것 같습니다. 다들 공짜로 받아가시려고만 해서요. 좀 씁쓸하죠.

    - 지금까지 이런 '역사 알리기 운동'을 해오시면서 어려움이 상당히 많으셨을텐데요. 반대로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신 분들도 계시지 않습니까?

    ▲가장 먼저 떠오른 분이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네요. 최근에도 제가 참석한 포럼 자리에서 "안 선생은 재미교포이신데 이렇게 오랫동안 역사를 제대로 알리고자 노력하시는 분"이라며 "이는 대한민국에 보배로운 일"이라고 극찬을 해주신 바 있습니다. 저희 하는 사업에 늘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으시는 분이죠. 최근엔 설송웅 전 의원께서도 많은 도움을 주고 계십니다.



  • - 전공이 경영학이신데, 어느 날부터 전혀 관련도 없던 역사 문제에 뛰어들었다는 점이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집사람이 성당에서 성가대장을 할 때였어요. 갑자기 마리너스 수사님 장례미사에 같이 가자는 겁니다. 당시는 아내가 고속도로 운전을 안 할때라 제가 같이 동행하게 된 거죠. 저는 흥남철수 얘기를 그때 처음 들었습니다. 2001년 당시 저는 무역 관련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요. 제가 공부한 전공과 하는 일은 역사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죠.

    그런데 사실 제가 대학 시절에는 사학과 교수님으로부터 "사학과로 전과하는 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받은 적도 있어요. 그 정도로 문과 체질이었어요. 평소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제일 재미있게 들었던 과목도 모 수녀님이 가르치신 종교역사개관이었어요. 해서 나름대로 한국사나 동양사, 서양사 등에 박식하다고 자부하고 있었죠.

    그런데 마리너스 수사님 장례미사에서 흥남철수작전에 대한 얘기를 듣고는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역사를 많이 안다고 자부했던 제가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에 대해선 너무 모르고 있었던 거죠. 옛날 얘기만 백날 해서 무엇하나? 우리와 피부로 맞닿아 있는 근현대사를 먼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그때부터 든 겁니다.

    이 분의 '기적적인 생애'를 접하게 되면서, 인생의 참 의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어떻게 사는 게 보람된 삶일까' '어떻게 인생을 정리하면 자녀들에게 본이 될까'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식이었죠. 결론은 '역사를 바로 알리자'는 거 였어요. 처음엔 마리너스 수사님의 행적을 좇아 가다 흥남철수작전을 살펴보기 시작했고, 이 긴박한 탈출이 장진호 전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되면서 6.25전쟁 전반에 대해 조사를 하게 됐습니다.

    - 빌 길버트(Bill Gilbert) 기자가 쓴 기적의 배도 그때 처음 접하게 된 거죠?

    ▲네, 그렇습니다. 단편적으로 번역 작업을 하다 수소문 끝에 러니씨를 만났고, 보다 구체적인 사실을 알게 됐죠. 저에게 큰 도움을 주신 분입니다. 러니씨는 그동안 흥남철수작전에 대한 많은 자료를 모아 온 자신이 '2대 캡틴'이라고 자부해 왔는데, 자기가 죽으면 먼지 속으로 다 없어질 자료들을 세상에 드러내 빛으로 끌어준 저(안재철)를 '3대 캡틴', 즉 '캡틴 오브 스토리(Captain of Story)'라고 부르고 싶다고 하더군요. 흥남철수에서 있었던 휴머니즘을 알리고, 지금도 독재와 억압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을 구원해야 한다는 제 신념이 감동적이라면서요. 러니씨는 저에게 "북한 주민 모두가 자유로운 세상에서 사람답게 살수 있는 그 날이 올때까지 제가 운항하는 생명의 항해가 지속되기를 바란다"고 기원해 주셨습니다.

    - 안재철 이사장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이건 마치 사람이 새로 태어난 것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같은 운동에 몸을 던지게 된, 보다 깊은 동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

    ▲처음엔 제가 이 사업을 시작하면서 성 바오로 수도원(뉴저지주 뉴튼에 있는 성 베네딕도 수도회 중 하나)에 기념공원 같은 걸 지으면, 이게 성공하는 프로젝트라고 생각했어요. 처음부터 종교적인 미션 같은 건 없었습니다. 그런데 2008년 '생명의 항해'라는 책을 펴내고 청계광장에서 촛불시위대에게 수난을 겪으면서 제 스스로 변화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한쪽에선 '그런 사업이 한국에서 되겠니? 그냥 다 접고 미국으로 들어와라'는 비아냥이 들리는 듯 했고, 다른 쪽에선 '그래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하는 오기가 치솟았습니다. 제 세례명이 공교롭게도 베네딕도입니다. 라루 수사님이 몸 담은 수도회와 같은 이름이죠. 가만 생각해보면 수사님과 제가 뭔가가 통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해요. 또 제 바로 윗 누님이 수녀님이거든요.

  • 이승만 대통령(우)을 부축해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맥아더 장군(좌).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중에서
    ▲ 이승만 대통령(우)을 부축해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맥아더 장군(좌).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중에서



    - 이사장님께는 기독교 DNA가 흐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21살 때부터 죽는 순간까지 약 70년 동안 변함이 없고 꺾이지 않는 불굴의 신념을 보여준 것처럼 이사장님도 15년 동안 변함이 없고 꺾임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우연한 계기로 이런 일에 뛰어들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미션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도 대한민국을 태어나선 안될 나라로 치부하는 세력이 있는 것을 보면 분통이 터집니다. 그들은 한반도가 공산화 돼서 사람들이 다 굶어죽어야 만족할 사람들입니다. 만일 그때 우리가 북한에 점령 당했다면 지금의 부와 번영을 누릴 수가 있었을까요?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구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진 한 장이 있습니다. 9.28서울수복 행사가 중앙청에서 열렸는데, 2층에 함께 있던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 행사장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을 찍은 사진입니다. 맥아더 장군이 이승만 대통령의 팔을 꼭 붙들고 다정하게 내려오는 장면이죠.

    당시 맥아더 장군은 유엔군사령관이었습니다. 아시아 총독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이었는데요. 어떻게 이승만 대통령을 이렇게 대할수 있었을까요? 바로 이승만 대통령의 카리스마, 지도력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닌 척 하지만, 백인들 사이에선 솔직히 동양 사람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거든요. 사람을 가슴 속에서부터 존경하는 마음이 나오지 않으면 이런 극진한 태도를 보일 수가 없습니다. 이 사진을 보면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경매에 내놓은 이승만 대통령의 구멍난 속옷 사진도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예전에 몇몇 기사를 통해 이런 일화를 접하곤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는데요. 반면에 김일성이 평양역에 내려 사람들과 악수하는 사진은 정말 가관이었습니다. 83년 미네소타대학에 다닐때 도서관에서 봤던 사진인데요. 그가 입은 인민복을 보면, 말이 인민복이지 옷감이 너무너무 좋은 옷이라는 걸 대번에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정도로 북한 수뇌부들이 '위선적인 집단'이었다고 할 수 있는 거죠.

    - 이승만 대통령 덕분에 이 나라가 공산화가 안됐는데, 사람들은 아직도 이 분을 폄하하는데만 열을 올리고 있어요.

    ▲촛불시위 하시던 분들이 우리가 전시한 사진들을 불태울때 처음 깨달았어요. 우리나라에 이렇게 폭동 세력이 많은 줄은 미처 몰랐죠. 낮에 시위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신사적이었거든요. 비가 오던 어떤 날은 어린 애를 데리고 나온 한 여성 분이 우산을 말아서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의 사진 속 눈을 마구 찌르는 장면을 목격한 일이 있어요.

    저는 지금도 이 분이 내뱉은 말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이 새끼 때문에 통일이 안됐다." 그날 밤이었어요. 시위대 속에서 "김정일 장군, 김일성 수령 만세"라고 외치는 소리가 아주 많이 들렸죠. 그때 저희는 그 장소에 매일 있었어요. 그야말로 역사의 산 증인이죠. 저희가 당시 보고 느꼈던 것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 안재철이라는 사람이 40대 중반에 자신도 모르게 어떤 운동에 빠져 들게 됐고, 지금은 몸과 마음과 영혼을 다 바치는, 생명을 바치는 이 일에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는 상태라고 보여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시는 일이 하시는 만큼 효과가 안나고, 계속 방해받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나라에서 계속 '자유 운동'이 억압받는 상황에서 회의감을 느끼신 적은 없습니까?

    ▲거리 사진전을 진행하면서 자꾸만 전시회를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모든 과정에 제약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엔 중구청 담당자에게 솔직히 물어봤어요. 대체 누가 전시회를 막고 있느냐고. 그랬더니 국정감사에서 우리가 하는 전시회가 도마 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서울시 국정감사였는데, 새정치연합 장하나 의원이 이 얘기를 꺼냈다고 하더군요.

    촛불시위 때 맥아더 장군 사진의 눈을 찔렀던 여성 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공산주의여도 좋다. 통일만 돼 다오" 이런 심정이었습니까? 어떻게 지켜온 이 나라인데, 감히 공산화를 정당화하는 생각을 품을 수 있는지 도통 이해가 안가요. 어중간한 '중간 통일', 혹은 '합작 정부'란 있을 수 없습니다. All or Nothing!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통일을 하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 연합군 병사들이 전우들의 시신을 묻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중에서
    ▲ 연합군 병사들이 전우들의 시신을 묻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중에서



    - 잠시 화제를 돌려볼까요? 흥남철수작전이 이렇게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는 이유는 당시 미군이 위험을 무릅쓰고 적국(북한)의 주민들을 적극적으로 구제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 현봉학 박사가 알몬드 장군에게 애원하자, 즉석에서 무기를 바닷 속에 버리고 대신 피란민들을 태우는 장면이 나오죠.

    ▲영화라는 특성상 당시 사실을 조금 과장되게, 극적으로 표현한 부분들이 있는데요. 메러디스 빅토리 호가 흥남부두에 도착했을 때 이미 다른 배들이 정박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배를 바로 댈 수가 없으니 다리를 놔서 피란민들이 무사히 배 안으로 승선할 수 있었죠.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는 그물망을 타고 올라온 피란민들은 없었습니다.

    영화 속에선 미군들이 처음엔 피란민들을 구하지 않으려 했다가 현봉학 박사 등이 간청을 하자, 마지못해 피란민들을 배에 태우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이건 휴머니즘이 아닙니다. 역사적인 사실과도 다르고요. 미군은 처음부터 흥남에서 피란민들을 철수시키기로 결정을 한 상태였습니다. 10만명이라는 많은 인파를 구출한 사건입니다. 어떻게 이런 중대한 결정을 현장에서 즉석으로 내릴 수 있겠습니까? 만일 전쟁 한 복판에서 이런 결정을, 특히 무기를 바닷 속에 버리라는 결정을 실제로 내렸다면 그 사람은 총살감입니다. 애당초 피란민을 실을 배에는 무기를 싣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맥아더 장군은 이미 12월 8~9일에 군단을 철수시키고 사람들을 대피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제가 미국 국방성에서 비밀 해제된 흥남철수 당시의 10군단 사령부 지휘 보고서와, 10군단 사령부와 유엔군 사령부 간의 무선통신 전문 등 9개 문서를 일일이 확인해 알게 된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해 영화 속에 맥아더가 나오면 흥행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등장시키지 않았다는 우스갯 소리도 있더군요.  

    - 그렇다면 직접 집필하신 '생명의 항해'에는 이같은 내용들이 다 담겨 있는 건가요?

    ▲당초 알려지기로는 한 육군 장성이 흥남철수작전 직전에 "만약 미군이 피란민을 구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앞에서 배라도 갈라야 한다. 육로로라도 피란민을 데리고 가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는데요. 현실은요. 우리 국군은 12월 16일까지 흥남항에서 전면 철수했습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1만 4천명의 피란민들이 승선한 건, 그로부터 일주일 뒤였죠. 저는 이런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었습니다. 과거 역사에 대해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 책 속엔 제가 가장 아끼는 사진 한 장이 있는데요. 1950년 12월 8일 철수하는 미 해병 1사단 고토리 임시 캠프 주변에 수천명의 북한 주민들이 모여있는 모습을 촬영한 항공 사진입니다. 미군은 이미 장진호 전투 때부터 무작정 유엔군을 따라 나선 북한 주민들을 함께 데리고 왔습니다. 당시 개마고원에 있던 사람들은 "미군을 좇아가면 산다"며 자유세계로 가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모여들었습니다. 미군은 중공군 간첩이 숨어 있을지도 모를 피란민 대열을 그대로 끌고 왔습니다.

    유엔군이 흥남항을 향해 철수할 당시, 황초령 고개 북쪽 협곡에 있던 수문 교량 상판을 중공군이 폭파시켜 유엔군이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했을 때의 상황도 담았습니다. 이때 미군은 C-119 수송기로 8개의 경간으로 나눠진 교량을 떨어뜨려 임시 가교를 잇는 기지를 발휘합니다. 이에 대한 기록은 1950년 12월 18일자 타임지에 자세히 소개돼 있습니다. 당시 시도한 교량 투하 작전은 세계 전투역사상 처음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 앞으로 당면 과제나 구체적인 청사진 등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죠.

    ▲언젠가 대통령께서 통일은 대박이라고 하셨는데, 북한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해방시키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통일이요, 대박이 아닌가 싶습니다. 올해는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광복을 맞은지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통일의 염원을 담은 아주 특별한 기획을 구상 중입니다.

    예를 들면 전쟁통에 찍힌 다양한 사진 속에서 잃어버린 우리 이웃, 잃어버린 부모님 등을 찾는 대국민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거죠. 실제로 저희가 전시한 사진을 보신 한 노신사께서 "당시 공군회관 자리에 있던 남부훈육소 사진"이라는 제보를 해주시기도 했고, 우연히 피아니스트 한동일씨가 찍힌 사진을 수집한 뒤 나중에 사진 속 주인공을 발견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진들을 함께 공유하고 호흡하면서, 나라에 대한 소중함과 진정한 애국애족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 1950년 12월 8일 철수하는 미 해병 1사단 고토리 임시 캠프 주변에 수천명의 북한 주민들이 모여있는 모습을 촬영한 항공 사진.  전투분석연구소(Combat Studies Institute)에서 발행한 『참모들의 작전 수행: 한국주둔 10군단, 1950년 12월』에 따르면, 당시 미 해병대가 고토리에서 퇴각할 때 수천 명의 주민이 그들의 행렬을 뒤따라 와, 사실상 피란민들의 대규모 이동이 시작됐다는 내용이 기술돼 있다.  이와 관련 안재철 월드피스자유연합 이사장은 "개마고원 일대에 있던 대부분의 주민은 자유세계로 가기 위해 유엔군이 흥남을 향해 철수할 때 자신들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작정 유엔군을 따라나섰다"며 "이는 미군들이 장진호전투의 시작부터 흥남철수작전이 끝날 때까지 인도주의적인 관점에 입각해 북한피란민들을 구출했다는 것을 생생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밝혔다.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중에서
    ▲ 1950년 12월 8일 철수하는 미 해병 1사단 고토리 임시 캠프 주변에 수천명의 북한 주민들이 모여있는 모습을 촬영한 항공 사진. 전투분석연구소(Combat Studies Institute)에서 발행한 『참모들의 작전 수행: 한국주둔 10군단, 1950년 12월』에 따르면, 당시 미 해병대가 고토리에서 퇴각할 때 수천 명의 주민이 그들의 행렬을 뒤따라 와, 사실상 피란민들의 대규모 이동이 시작됐다는 내용이 기술돼 있다. 이와 관련 안재철 월드피스자유연합 이사장은 "개마고원 일대에 있던 대부분의 주민은 자유세계로 가기 위해 유엔군이 흥남을 향해 철수할 때 자신들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작정 유엔군을 따라나섰다"며 "이는 미군들이 장진호전투의 시작부터 흥남철수작전이 끝날 때까지 인도주의적인 관점에 입각해 북한피란민들을 구출했다는 것을 생생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밝혔다.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중에서


    인터뷰어 = 인보길 뉴데일리그룹 회장
    인터뷰이 = 안재철 월드피스자유연합 이사장
    정리/취재 = 조광형 기자
    사진 = 정상윤 기자
    자료제공 = 월드피스자유연합



    아래는 안재철 월드피스자유연합 이사장이 집필한 '생명의 항해' 주요 사진(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북한공산군이 수세에 몰리자 1950년 10월 중순 중공군은 은밀하게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북한공산주의자들이 6.25전쟁을 발발한 전쟁 초기부터 중국 공산당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전쟁에 참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진은 1951년 2월 얼어붙은 압록강을 걸어서 건너 6.25전쟁에 참전하는 중공군의 모습.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중에서
    ▲ 북한공산군이 수세에 몰리자 1950년 10월 중순 중공군은 은밀하게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북한공산주의자들이 6.25전쟁을 발발한 전쟁 초기부터 중국 공산당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전쟁에 참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진은 1951년 2월 얼어붙은 압록강을 걸어서 건너 6.25전쟁에 참전하는 중공군의 모습.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중에서

  • 1950년 중공군 2차 공세 때 한반도 북동부 전선 장진호전투에서 유엔군을 공격하는 중공군들.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중에서
    ▲ 1950년 중공군 2차 공세 때 한반도 북동부 전선 장진호전투에서 유엔군을 공격하는 중공군들.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중에서
     
  • 흥남철수작전 당시 북한피란민 14,000명을 구출한 미국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허무하게도 이미 사라졌지만, 배의 부속품 중 몇 가지가 유품으로 미국 해운청의 수산 베이 예비선단에 보관돼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중 일부는 안재철 이사장과 월드피스 밀레니엄파크 기념관에 귀속돼 전시될 예정이다.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중에서
    ▲ 흥남철수작전 당시 북한피란민 14,000명을 구출한 미국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허무하게도 이미 사라졌지만, 배의 부속품 중 몇 가지가 유품으로 미국 해운청의 수산 베이 예비선단에 보관돼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중 일부는 안재철 이사장과 월드피스 밀레니엄파크 기념관에 귀속돼 전시될 예정이다.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중에서
     
  • 2002년 11월 24일 새롭게 출발하는 뉴튼 수도원 피정의 집 개원행사. 성가정 상 앞에서 뉴저지 주 패터슨 교구장 프랭크 로디어 주교와 촬영한 수도자들. 레너드 라루 선장이 선원생활을 접고 마리너스 수사로 수도 생활을 했던 바오로 수도원은 다시 부흥하기 시작했다.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중에서
    ▲ 2002년 11월 24일 새롭게 출발하는 뉴튼 수도원 피정의 집 개원행사. 성가정 상 앞에서 뉴저지 주 패터슨 교구장 프랭크 로디어 주교와 촬영한 수도자들. 레너드 라루 선장이 선원생활을 접고 마리너스 수사로 수도 생활을 했던 바오로 수도원은 다시 부흥하기 시작했다.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중에서
     
  • 2001년 여름 바오로 수도원에서 투병 중인 14,000명의 북한 주민을 구출한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전 선장 마리너스 라루 수사(가운데)와 함께한 조엘 매이컬 당시 바오로 수도원 원장 신부(왼쪽)와 바오로 수도원 인수를 위해 방문한 김구인 당시 왜관수도원 원장 신부(오른쪽).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중에서
    ▲ 2001년 여름 바오로 수도원에서 투병 중인 14,000명의 북한 주민을 구출한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전 선장 마리너스 라루 수사(가운데)와 함께한 조엘 매이컬 당시 바오로 수도원 원장 신부(왼쪽)와 바오로 수도원 인수를 위해 방문한 김구인 당시 왜관수도원 원장 신부(오른쪽).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중에서
     
  • 흥남철수작전 당시 북한 피란민 14,000명을 구출한 미국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선원들의 모습.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중에서
    ▲ 흥남철수작전 당시 북한 피란민 14,000명을 구출한 미국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선원들의 모습.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중에서
     
  • 1950년 12월 26일 아침부터 거제도에서 하선하는 북한 피란민들. 북한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의 땅인 거제도에 도착한 이들은 비록 이제부터 고단한 인생을 시작해야 했지만, 안전하게 자유의 땅에 도착한 안도감으로 얼굴에는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중에서
    ▲ 1950년 12월 26일 아침부터 거제도에서 하선하는 북한 피란민들. 북한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의 땅인 거제도에 도착한 이들은 비록 이제부터 고단한 인생을 시작해야 했지만, 안전하게 자유의 땅에 도착한 안도감으로 얼굴에는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중에서
     
  • 메러디스 빅토리 호 갑판 위를 발디딜 틈이 없도록 가득 메운 북한 주민들.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중에서
    ▲ 메러디스 빅토리 호 갑판 위를 발디딜 틈이 없도록 가득 메운 북한 주민들.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중에서
     
  •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선창을 가득 메운 북한 피란민들.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중에서
    ▲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선창을 가득 메운 북한 피란민들.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중에서
     
  •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항복한 북한군들. 이들은 우리와 같은 모습을 한 사람들이었다. 뒷편의 젊은이는 아직 군대에 가기에는 너무 어려 보인다.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중에서
    ▲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항복한 북한군들. 이들은 우리와 같은 모습을 한 사람들이었다. 뒷편의 젊은이는 아직 군대에 가기에는 너무 어려 보인다.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중에서
     
  • 메러디스 빅토리 호로 다가온 북한군. 이들은 이미 민간인 옷으로 갈아 입고 항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중에서
    ▲ 메러디스 빅토리 호로 다가온 북한군. 이들은 이미 민간인 옷으로 갈아 입고 항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중에서
     
  • 1950년 12월 흥남항에 몰려 철수를 기다리는 북한주민들. 이들이 구출될 수 있는 길은 바다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사진에 보이는 배는 북한피란민들을 태우고 떠난 미 해군 상륙정 제퍼슨 카운티(USS Jefferson County) 호.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중에서
    ▲ 1950년 12월 흥남항에 몰려 철수를 기다리는 북한주민들. 이들이 구출될 수 있는 길은 바다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사진에 보이는 배는 북한피란민들을 태우고 떠난 미 해군 상륙정 제퍼슨 카운티(USS Jefferson County) 호.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중에서
     
  • 1950년 12월 흥남항에 모여있던 북한 피란민들이 배를 타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중에서
    ▲ 1950년 12월 흥남항에 모여있던 북한 피란민들이 배를 타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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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버트 러니가 우석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는 모습. 안재철 월드피스자유연합 이사장은 "우석대학교(김영석 총장, 맨 앞쪽)에서 수여한 명예 정치학박사는 북한 피란민 14,000명을 구출한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상급선원이었던 로버트 러니 변호사가 피란민 구출작전을 통해 보여준 인도주의적 희생, 사랑, 헌신에 대한 공로와 그가 지난 50년을 한결같이 지속적으로 추진해 온 생명구출과 자유의 중요성에 대한 홍보 활동을 기리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밝혔다.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중에서
    ▲ 로버트 러니가 우석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는 모습. 안재철 월드피스자유연합 이사장은 "우석대학교(김영석 총장, 맨 앞쪽)에서 수여한 명예 정치학박사는 북한 피란민 14,000명을 구출한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상급선원이었던 로버트 러니 변호사가 피란민 구출작전을 통해 보여준 인도주의적 희생, 사랑, 헌신에 대한 공로와 그가 지난 50년을 한결같이 지속적으로 추진해 온 생명구출과 자유의 중요성에 대한 홍보 활동을 기리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밝혔다.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중에서
     
  • 2006년 3월 초,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로버트 러니씨를 직접 찾아와 6.25전쟁 당시의 인도주의적인 구출작전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한 김문수 국회의원.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중에서
    ▲ 2006년 3월 초,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로버트 러니씨를 직접 찾아와 6.25전쟁 당시의 인도주의적인 구출작전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한 김문수 국회의원. ⓒ 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중에서
     
  • 박근혜 대통령(당시 한나라당 대표)은 2006년 3월 2일 국회를 방문한 ‘흥남철수의 영웅’ 로버트 러니 부부와 (사)월드피스자유연합 안재철 대표를 초청해 “우리 국민들을 구출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 월드피스자유연합
    ▲ 박근혜 대통령(당시 한나라당 대표)은 2006년 3월 2일 국회를 방문한 ‘흥남철수의 영웅’ 로버트 러니 부부와 (사)월드피스자유연합 안재철 대표를 초청해 “우리 국민들을 구출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 월드피스자유연합

    [사진 제공 = (사)월드피스자유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