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숨어있던 남로당 RO 교사 "김일성 장군 만세" 3창시키고 '해방축하' 공연까지
  • <시장경제신문 77호/ 연재 '인보길의 역사 올레길'(65)>

    ‘전교조’ 보면 떠오르는 얼굴, 6.25때 담임!

    학교에 숨은 남로당 RO 교사 "김일성 장군 만세" 3창

    뉴데일리가 발행하는 격주간지 <시장경제신문>에 <역사 올레길> 연재를 시작하였을때
     내 고향 당진(唐津)에서 출발하였는데 요즘 모임에서 자꾸 고향 옛이야기를 요구 받는다. 
    연재 첫회 내용은 평택과 당진을 연결하는 다리 서해대교의 이름을 '백제대교'로 고치라는 나의 주장, 즉 아산만은 백제 건국의 땅이요 700년후 멸망한 최후의 해전 '백강전투'의 격전지였음에
    일본을 겨냥한 '한류의 다리'로서 의미가 크므로 '백제대교'가 어울린다는 요지였다.
    이번에 독자들의 요구는 1천500년 전 백제 이야기가 아니라 64년전 6.25때 사연이다.
    지난 달 조선일보(11.22일자)에 게재된 ‘남정욱 교수 명랑소설’ 덕분이다.
     남 교수(숭실대)는 이 칼럼에 ‘인보길 소년의 이승만 규탄 웅변’을 거론하면서 불세출의 이승만 리더십을 풀어 놓았다. 70대이상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6.25의 추억, 공산 치하 3개월간 ‘전쟁과 소년’ 이야기를 요약해 본다.
  • 아산만을 가로 지른 서해대교.
    ▲ 아산만을 가로 지른 서해대교.

    ▶충남 당진군 고대면(高大面) 장항리(長項里) 아담한 들판을 가로지르는 신작로(新作路)를 따라 산모롱이 돌아 돌아가면 조그만 우리 학교 고대(高大)초등학교가 나온다. 그때는 국민 학교,
    1950년 그해 여름 6월 어느날 등교한 4학년 반장 인보길은 깜짝 놀랐다. 
담임선생이 들어오자마자 백묵으로 ‘김일성 장군 만세’를 칠판 가득 쓰는 게 아닌가.
김일성이 누구지? 어리둥절한 어린이들 앞에서 선생은 “반장 나와, 김일성 장군 만세를 불러라” 지시했다. 만세 삼창을 함께 부른 선생은 이번엔 ‘조선 인민공화국 만세’를 써놓고 또 명령했다. 반장의 선창에 따라 소년소녀들은 6번이나 만세를 불렀다.

10세 소년 열변 "독재자 이승만을 태평양에 장사 지냅시다" 쾅~~

▶교단에 숨어있던 ‘남로당 RO’ 선생은 즉시 교장이 되었고 ‘붉은 소년단’을 조직하여 4학년 반장을 단장으로 임명하였다. 그가 직접 준비하는 ‘남조선 해방 예술제’의 각본에 따라 연극, 독창, 합창 등의 공연 연습에 들어갔다. “개막 인사는 단장이 해야 한다”며 교장은 웅변 원고를 써주고 1대1 연습을 얼마쯤 했을까. 고대면 순회공연이 시작되었다. 낮에는 연습하고 저녁이면 마을을 돌며 동원된 관중 앞에서 ‘개막 웅변’으로 막을 열었다. 잊히지않는 마지막 대목, 남 교수가 인용한 대목이다. 
“...독재자 이승만 미국 괴뢰도당을 태평양 깊은 물에 장사 지냅시다...” 콰앙~ 탁자를 주먹으로 치면 “옳소~~” 박수와 함성이 쏟아진다. 이어서 장군의 노래 합창을 시작으로 빨치산 김일성 연극이 펼쳐진다. TV가 없던 시절, 영화는커녕 라디오도 몰랐던 벽촌 사람들은 어린이들 공연에 열광하였다. 역사도 이념도 알 턱 없는 순박한 농민들에게 소년은 아이돌 스타가 되었다.
  • 6.25때 공산군이 학살한 시체들.(자료사진)
    ▲ 6.25때 공산군이 학살한 시체들.(자료사진)
    아버지는 밤마다 인민재판에...어머니는 인민군에 시달려

  • ▶“바른대로 말해. 반동 놈을 어디 숨겼느냐?” 벼락 같은 소리에 잠자던 소년은 벌벌 떨었다.
    인민군 두명이 어머니와 아버지 가슴에 ‘따발총’을 들이대고, 경찰 지서장이던 외삼촌의 행방을 대라는 것이다. 그들은 날마다 밤이 깊어지면 나타나 집안을 뒤지고 행패를 부렸다.
    이장(里長)이던 아버지는 동네 당산 소나무 아래서 밤마다 열리는 회의에 끌려나가 인민재판을 받고, 재판이 끝나면 재판기록을 작성해야 했다. 문자를 아는 ‘동네 빨갱이’가 한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인가(印家) 집성촌 지주의 막내아들 아버지 역시 ‘반동분자’인지라 학살 대상 1순위, 사람들은 “실컷 부려 먹고 죽인대요” 수근거렸다. 
    ▶추석이 다가오면서 자가 발전기 조명이 부족한 무대를 둥근 달빛이 밝혀주던 그날 밤, 안보이던 교장은 공연이 끝난 뒤 불쑥 나타나 내 손을 끌고 가더니 속삭였다.
    “웅변 원고랑 연극 대본, 악보를 불태워라. 아무도 모르게...” 그리곤 종적을 감추었다.
    그 다음 다음날이던가, 앞마당 돗자리에서 잠든 나를 머슴이 흔들었다. 집 앞 신작로에 줄줄이 달려오는 군 트럭의 행렬, 맨 앞에 달려오던 지프차가 멈추었다.
    “누님...누님...자형...보길아...” 얼싸안는 군인 철모엔 하얀 MP 헌병 글자, 외삼촌이었다.
    미군 트럭위엔 새까만 얼굴들이 달빛에 하얀 이빨만 번뜩이며 박스들을 마당으로 옮겼다.
    “추석선물입니다. 나눠 드세요.” 외삼촌 말에 동네사람들이 박스를 뜯었다. 쏟아지는 깡통들은 미군용 통조림, 껌과 초콜릿, 난생처음 먹어본 지상최고의 맛은 지금도 너무나 짜릿하다.
    “하루만 늦었어도 큰일 날뻔 했습니다.”
    외삼촌이 내민 ‘학살자 명부’ 첫 단에 아버지와 내 이름이 올라 있었다..

    대학생땐 4.19 데모 ...'이승만 다시 보기'까지 반세기

    ▶우리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다. 담임은 바뀌었고 반장은 그대로 인보길, 그날 낌새가 이상하더니 교문을 나서는 나를 선배들이 에워쌌다. “우리한테 자수해라. 자수 안하면 넌 총살이야..”
    인민재판 하자며 뒷산으로 끌고 가는 그들의 손에서 퇴근하던 새 담임이 구출해주었다.
    한 달쯤 지나 이번엔 머슴이 누런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어린애를 경찰이 왜 부른다냐?”
    소환장을 들고 누나와 함께 경찰서에 ‘출두’하자 책상에 밀어놓는 문서는 ‘자수서’였다.
    <공산당에 부역한 죄를 깊이 뉘우치고 대한민국에 충성할 것을 맹서한다>는 서약서와 함께, 치안대 청년이 나의 열 손가락에 인주를 묻혀 찍었다. 소년은 알 수 없는 눈물만 흘렸다.
    “울지 말구 공부 잘해. 빨갱이들은 어린 애들을 이용해 먹으니까 조심하구, 응? 허허허”
    외삼촌의 부하 직원은 소년의 등을 토닥거리며 웃었다.
  • 뉴데일리 이승만 연구소 총서(1) 인보길 엮음 [이승만 다시 보기] 표지. 기파랑 출판. ⓒ뉴데일리
    ▲ 뉴데일리 이승만 연구소 총서(1) 인보길 엮음 [이승만 다시 보기] 표지. 기파랑 출판. ⓒ뉴데일리
    ▶대학생이 된 소년은 1960년 4월 19일 데모에 앞장선다. “국민이 원하면 하야한다”는 성명과 함께 이승만이 물러난 5년후 조선일보 기자가 되고, 30년후 조선일보가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시회를 열었을 때 처음으로 이승만의 실체에 눈을 뜬다. 그리고 은퇴후 이승만 연구소를 차린다.
    총서 제1권으로 [이승만 다시보기]를 발행하면서 그 머리말에 소년의 이승만 추억도 간단히 소개하였다. 지난 달엔 미국에 불려가 “이승만은 독재자가 아니었다”는 강연도 했다.
  • 10세 소년이 담임선생으로부터 처음 접한 ‘독재자 이승만’의 진실을 재발견하기까지 장장 반세기세월이 걸린 셈. 이 순간에도 교실에서 ‘독재자 이승만’을 배우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6.25때 내가 생각나고, 오늘의 아이들도 그렇게 버려둘 것인가 걱정이 든다.
    잘생기고 인자하던 그 빨갱이 담임 선생, 지금도 ‘전교조 사건’ 보도를 볼 때마다 그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인보길 기자, 뉴데일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