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카시즘’은 [진보]가 만들어낸 ‘신화(神話)’
  • 

      '進步主義者들은 항상 叛逆者(반역자)들이다'

  • 진보주의자들은 20세기의 가장 큰 전쟁이었던
    동서냉전(東西冷戰)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침(浮沈)했던
    바보였고 배신자들이었다

    李東馥   
     
    미국의 보수진영을 대표하는 여성 정치평론가인 앤 코울터가 저술하여
    2003년에 출판(출판사: William Morris Agency, LLC.)한
    <반역>의 제1장(반역의 50년)을 발췌.

      
    진보주의자들은 반역(反逆)의 자리를 차고앉는데 상상을 뛰어넘는 재능이 있다. 단어 만들기 게임을 하면 그 사람들은 즉시 반미(反美)라는 글자 쪽으로 몰릴 것이다. 누구나 진보주의자들도 미국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안으로부터든 밖으로부터든 미국이 공격을 받을 때 진보주의자들은 적(敵)의 편에 선다.

    이것이 그들의 핵심(核心)이다. 좌파(左派)들이 가지고 있는 서방세계의 범죄에 대한 집념이나 제3세계의 야만일(野蠻人)들에 대한 루소(Rousseau)적 존경심도 모두 이러한 반역적 목적으로부터 나온다. 누군가가 좌파들이 미국에게 자행(恣行)해온 알려지지 않은 기록을 지적(指摘)이라도 하면 진보주의자들은 그 순간 돌아서서 “매카시즘(McArthyism)이다!”라고 소리를 지른다.   

    진보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애국심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당돌하게 질문하는 것을 불법화하기 위해 ‘매카시즘’이라는 신화(神話)를 만들어 냈다. 그들은 민권(民權) 운동에 관한 한 자신들이 우위(優位)에 있다는 (허위에 가득 찬) 자랑을 하면서도 미국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忠誠心)을 논하는 것은 금기(禁忌)로 만들어 버렸다. 어째서 두 정당(민주당과 공화당)의 애국심을 비교하는 것이 토론의 영역(領域) 밖의 문제라는 것인가? 어째서 우리는 민주당과 공화당 중 어느 쪽이 더 애국적이냐는 질문을 할 수 없다는 말인가? 이 문제는 결코 법정(法廷)에서 다루어질 문제가 아니다.  

    50년 전 조지 매카시(George McArthy) 상원의원은 “이 나라의 민주당 당원 가운데는 더 이상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다”고 갈파(喝破)했다. 그로부터 여러 가지 증거(證據)가 쏟아져 나왔다. 진보주의자들은 나라를 사랑하는 미국인들에게 ‘카우보이’, ‘전쟁광(戰爭狂)’, ‘종교적 광신자(狂信者)’ 또는 ‘주전론자(主戰論者)’ 등의 부정적인 호칭(呼稱)을 뒤집어씌운다. 반대로 미국의 적(敵)에 대해서는 ‘조 아저씨(Uncle Joe)’, ‘피델(Fidel)’, ‘농지개혁가’, ‘종교적 평화의 실천자’ 등의 긍정적 호칭을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엉뚱하게도 공산주의자들과 테러리스트들에게는 ‘평화의 수호자(守護者)’라는 터무니없는 호칭이 부여된다.  

    진보주의자들은 국민들에 대해 적을 친구로, 그리고 친구를 적으로 취급할 것을 요구한다.  '봉쇄를 해제'하고 '무역제재를 해제'하고, '군대를 철수'하고, '적들과 타협하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에 개입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누군가가 미국을 해치려는 증거가 나와도 '증거가 없다'고 완강하게 부인한다. 민주당의 상원의원과 전직(前職) 대통령들은 쿠바(Cuba), 니카라과(Nicaragua), 북한, 이라크(Iraq)와 같은 미국의 적대국(敵對國)에 끼어들어 미국을 증오(憎惡)하는 온갖 독재자들과 희희낙락(喜喜樂樂)한다.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Raden)이 미국에 대한 ‘9·11 대량살상(大量殺傷) 공격’을 감행한 지 1년 뒤에 민주당의 한 상원의원은 “빈 라덴이 ‘노인복지관(老人福祉館)’을 설립하는 좋은 일을 했다”고 칭찬하는 발언을 했다. 최소한 우리는 테러와의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빈 라덴을 ‘토지개혁가(土地改革家)’라고 부르는 진보주의자들의 기행(奇行)이 자취를 감추게 된 데 대해 감사해야 한다.  

    <미국인권연합>(ACLU: Amercian Civil Liberty Union)은 9·11 테러 사건 직후 학교들이 “신(神)이여, 미국을 축복(祝福)하소서!”(God Bless America)라는 표어를 내어 걸자 그 학교들을 고소(告訴)하겠다고 위협했다. ACLU 등의 반대 때문에 전국적(全國的)으로 공립학교에서 하는 충성맹세(Pledge of Allegiance) 의식(儀式)도 금지되었다. 학교 어린이들에게 ‘충성맹세’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더 애국적인가, 아니면 덜 애국적인가? 어떤 대학 교수들은 ‘애국심이 강한 미국인’들을 가리켜 “천진난만(天眞爛漫)(Naive)하다”고 하면서 ‘애국심’이란 “분노한 사람들을 위하여 존재하는 선의(善意)의 보호막(保護幕)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국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애국적인가? 아니면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천진난만’하고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라고 비아냥대는 것이 더 애국적인가? 이 같은 질문들은 인간세계의 상식적인 논리의 차원에서는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질문들이다.  

    진보주의자들은 미국을 비난하면서도 아무도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문제 삼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의 궤변(詭辯)에 의하면 ‘애국심’이란 '절대적으로 중요하지만 아무도 측정(測定)하는 것이 불가능한 애매모호(曖昧模糊)한 것'이다. 진보주의자들은 군대, 충성맹세, 국방(國防) 및 국기(國旗)에 대해 줄기차게 반대한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그들이 반대하는 군대, 충성맹세, 국방 및 국기 등을 옹호(擁護)하면 즉각 ‘미친 놈’이나 ‘바보’ 등의 비칭(卑稱)을 동원하여 비방(誹謗)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진보주의자들에 의하면, 이 같은 그들의 ‘비애국적’ 행동의 부당성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곧 ‘매카시즘’이다.   

    1988년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조지 부시(George H. Bush) 후보가 그의 경쟁 상대였던 민주당의 마이클 듀카키스(Michael Dukakis) 후보가 “학기 초에 학생들의 충성맹세를 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법안에 반대했다”는 사실을 지적하자 민주당의 진보주의자들은 “공화당이 암울했던 매카시 시대를 되살리려 한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듀카키스를 지지한 한 언론인은 부시가 듀카키스 후보의 분명치 않은 과거 기록을 들춘 것은 “미국 국민들 가운데 ‘표현의 자유가 미국이라고 부르는 위대한 거함(巨艦)을 이끌어가는 방향타(方向舵)’라는 진리를 배우지 못한 무식한 대중을 선동하려는 것”이라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다시 말하면, 이 언론인의 비틀어진 논리는 “민주당 사람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과감하게 지적한 공화당원들의 “자유로운 의사표시”는 “미국이라는 거함의 한 부분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미국에서 언론의 자유는 ‘반역자(叛逆者)’들의 언행(言行)만을 옹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일방적인 제동장치(制動裝置)일 뿐”이라는 것이 된다. 이 언론인은 부시가 “충성맹세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를 조장한다”고 비난했지만 동시에 “자신들이 ‘애국심’에 입각하여 충성맹세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는 분위를 조장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예 외면(外面)해 버리는 자가당착(自家撞着)의 모순을 피하지 않았다.   

    ‘진보주의’를 표방(標榜)하는 미국의 역사가들과 정치해설가들은 “부시가 ‘민주당 후보자의 애국심’에 대해 의구심(疑懼心)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교묘하게 여론을 조작하려 한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워싱턴포스트>의 한 칼럼니스트는 “부시의 언어(言語)는 ‘매카시즘 형식’을 띤다”면서 “그의 언어에 함축된 메시지는 듀카키스가 ‘비(非)애국적이고 국기에 대해 예의를 표하지 않으며 국방력을 약화시키는 사람’이라는 은유(隱喩)”라고 주장했다. 그런가 하면 <뉴욕타임즈>는 '거친 게임: 선거운동 저질화되다'라는 선정적(煽情的) 제목 아래 “부시는 자기의 몸을 국기로 휘감았다”면서 “부시는 ‘충성맹세, 국기, 강력한 국방력이 뭉쳐져야 애국심이 된다’는 것을 정치적 코드로 삼아서 유권자들의 잠재의식(潛在意識)에 호소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미국 민주당이 진보주의를 표방하면서 부시를 상대로 '매카시즘의 부활'이라는 시비를 걸고 나선 데 대해 보수적인 컬럼니스트인 로버트 노박(Robert Novak)은 “만약 매카시가 지금 살아있다면 듀카키스에 대해 우회적인 표현을 접고 ‘그는 공산주의자’라는 직설법적(直說法的)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반박했었다. ‘매카시즘’이란 미국인들에게 인기가 없었던 ‘진보주의자’들이 자신들을 옹호하기 위해 사용했던 신문용어(新聞用語)에 불과하다. 부시는 “진보주의자들은 내가 자신들을 ‘진보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한다”고 갈파(喝破)했었다. ‘진보주의자’들이 툭하면 ‘매카시즘’을 들고 나오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이 조국을 공격하고 있는 사실을 미국인들이 인식하지 못하도록 하는 연막작전(煙幕作戰)일 뿐이다.   

    ‘진보주의자’들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파스시트니, 인종주의자이니, ‘민권운동의 적’이니 하는 표현을 남용(濫用)하면서 모든 보수주의자들을 무차별적으로 비방한다. 민주당의 취약한 애국심을 보여주는 실제 사실들을 보수주의자들이 거론하는 것은 금기(禁忌)가 되어 있지만 진보주의자들이 언론의 사설과 기고문은 물론 심지어 영화와 영화평론 등을 빌어서 보수주의자들을 비방하고 폄훼(貶毁)하는 것까지도 ‘표현의 자유’에 의하여 보호받아야 하는 것이다. 

    진보주의자들은 국기를 멸시(蔑視)하고 국가에 대한 충성맹세를 금지하며 미국의 적들을 위한 칵테일 파티를 자유롭게 열면서도 어느 누구도 그 같은 그들의 비애국적 행동을 비판하는 것을 용인(容忍)하지 않는다. 진보주의자들은 부시가 듀카키스의 애국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자 “부시는 틀림없이 민권 문제가 나오면 반대하고 나설 사람”이라는 동문서답(東問西答)식 대응을 하고 나섰다. 여기에는 중대한 억지가 있다. 부시가 '듀카키스의 충성맹세 거부' 사실을 문제 삼은 것은 '표현의 자유 침해'지만 진보주의자들이 부시의 그 같은 발언을 가리켜 터무니없게도 “민권운동 반대 발언”이라고 강변(强辯)한 것은 “비방이 아니다”라는 강탈적 논리를 들고 나온 것이다. 심지어 진보주의자들은 “애국심이란 불량배(不良輩)들의 마지막 도피처(逃避處)”라면서 “애국심을 주의하라”고 경고(?)하기까지 했다.   

    자기 나라가 취하는 모든 조치에 반대하는 아젠다(Agenda)를 추진하는 것이 진보주의자들이 말하는 ‘진정한 애국심’이다. 심지어 누군가가 '미국을 지키는 것이 애국'이라고 정의(定義)하면 진보주의자들은 반드시 ‘매카시즘’을 들고 나와서 이를 희석(稀釋)시키려 한다. 미국에서 태어난 압둘라 알무지히르라는 한 무슬림이 방사능 폭탄을 제조했다는 혐의로 2002년 6월에 체포되자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테러리스트들이 뉴욕(New York) 맨해튼(Manhatten)의 번화가를 폭파(爆破)하는 것을 걱정했지만 <뉴욕타임즈>의 관심은 '매카시즘의 부활(復活)'이었다. <뉴욕타임즈>는 이 무슬림의 체포가 많은 미국인들에게 ‘매카시즘’의 부활과 함께 “대중의 마음 속에 스며 있는 두려움, 즉 국내에서 자생(自生)한 테러리스트가 외국의 적을 대신하여 미국 동포들을 배신(背信)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유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우려했다.   

    진보주의자들은 항상 자기 나라를 공격하는데, 그러면서도, 누군가 자기들을 비난하지 않을까 하는 주체할 수 없는 공포심을 갖는다. 9·11 사태 발생 후, 아직도 수천 명의 시체가 세계무역센터의 무너진 잔해 속에 묻혀 있는 시점에, 있었던 “나는 뉴욕시를 강타(强打)한 테러 행위 그 자체와 지금 매일처럼 백악관에서 쏟아져 나오는 종말론적(終末論的) 수사(修辭)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두려운 것인지 모르겠다”는 컬럼비아 대학 에릭 포너(Eric Foner) 교수의 발언의 경우가 예거될 수 있다. 이같은 자신의 발언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들리자 포너는 “나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를 협박하고 있다”면서 “나는 매카시즘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뚱딴지 같은 주장을 하기도 했다.   

    진보주의자들은 끊임없이 미국에 대해 반기(叛旗)를 들면서 매카시즘이라고 하는 병적(病的)으로 날조된 단어를 사용하여 미국인들이 “진보주의자들은 과연 미국을 사랑하는가?” 하는 질문을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다. 기나긴 세월 동안 민주당은 줄곧 국가방위와 관계된 모든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그 때가 냉전(冷戰) 시기였건 열전(熱戰) 시기였건, 이 나라를 이끌어서 위기(危機)를 극복하는 명예를 기피(忌避)해 왔다. 바로 반세기 전에 매카시가 주장했던 핵심(核心)은 이 같은 정당을 백악관에 들여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오늘날에 와서도 불변의 진리다. 미국의 적은 변한다. 그러나 배신은 여전히 배신이다.   

    그 동안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전개되어온 투쟁에서 패배자는 진보주의자다. 이는 그들이 반드시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고 (때로는 그렇기도 했지만) 그들이 공산주의에 대해 도덕적으로 전혀 무지(無知)했기 때문이었다. 민주당 정부 때 많은 공산주의 간첩들이 정부에 침투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원들은 한 번도 이 같은 사실들과 소련의 음모에 대해 진정으로 분노하지 않았다. 반대로 진보주의 엘리트들은 항상 배신자들을 옹호했다. 소련의 위협에 대처함에 있어서 민주당은 계속하여 패배적이고, 애원하고, 물러서는 입장이었다.   

    진보주의자들은 냉전 시기의 대부분을 ‘소련의 위협’을 구실로 유화주의(宥和主義·Appeasement)라는 이름의 ‘탁발(托鉢)’ 행위에 매달려 왔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의 ‘토지개혁’이라는 이름의 사기행위(詐欺行爲)의 실체(實体)를 꿰뚫어 보는 데 실패하고 그 결과 공산주의의 팽창이 불가피하다는 결정적인 판단의 오류(誤謬)를 저질렀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중국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고 자유세계가 추구하는 냉전의 종착역(終着驛)은 ‘승리’가 아니라 ‘데탕트’(Detente)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오류가 시정되는 순간이 왔다. 로날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1981-1989)의 출현이 그것이었다. 레이건은 공산주의자들의 호언장담(豪言壯談)이 빈 깡통이었음을 증명해 주었다. 공산주의가 지배할 것이라는 좌파의 목적론적 주장은 허구(虛構)임이 밝혀지고 동유럽 공산국가들의 붕괴는 물론이고 소련이 해체되었다.   

    진보주의자들은 20세기의 가장 큰 전쟁이었던 동서냉전(東西冷戰)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침(浮沈)했던 바보였고 배신자들이었다. 좌파들이 최후의 순간에 보여주는 호전성(好戰性)이 무엇이든 간에, 그들의 모든 행위는 미국인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미국인들의 분노를 억제하기 위한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의 진정한 목표를 큰 소리로 말하기에는 그 목표가 너무나 악질적(惡質的)이다. 진보주의자들이 소련을 옹호하여 떠들어 댄 것은 언제나 미국을 거역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반역자이거나 아니면 바보들이었다. 그리고 미국을 방위하는 문제에 관한 한 그들이 반역자였건 바보였건 그 둘 사이에는 차이가 없었다. 50여년에 걸친 그들의 반역행위는 줄어들지 않았다.   

    ------------------------  

    後記:

    이상의 글은 미국의 보수진영을 대표하는 여성 정치평론가인 앤 코울터(Ann Coulter)가 저술하여 2003년에 출판(출판사: William Morris Agency, LLC.)한 책 제1장(반역의 50년)을 발췌한 것이다. 필자가 이 글을 발췌하여 <조갑제닷컴>에 게재하는 이유는, 아마도 이 발췌문을 읽어 보는 분들이 공감(共感)하시리라고 생각하지만, 저자가 원문(原文)에서 그려 낸 미국이 정치, 외교, 국방 및 언론 등의 여러 영역에서 겪어야 했던 ‘진보주의’를 표방한 공산주의 동조세력들에 의한 ‘반역’의 역사가 1945년 해방 후 7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반도의 남한 땅에서 ‘진보주의자’로 분장(扮裝)한 친북(親北)·종북(從北) 성향의 용공(容共)·연공(聯共) 세력이 전개해 온 ‘반역’의 역사와 신기할 정도로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필자의 독후감(讀後感)으로는 코울터가 그려낸 미국에서의 ‘진보주의자’들에 의한 ‘반역’의 역사에서 등장하는 정당의 명칭을 대한민국의 특정 정당의 명칭으로 바꾸고 ‘진보주의자’ 대신 ‘친북·종북’ 성향의 ‘용공’·‘연공’ 세력을 대입(代入)시킨다면 원문의 내용은 바로 대한민국에서 일어났고 지금도 여전히 계속 전개되고 있는 상황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어서 이 글을 읽고, 더 나아가 책 전체를 통독(通讀)함으로써 이를 통하여 우리의 당면 과제인 ‘용공’·‘연공’ 세력을 효과적으로 다루는 데 필요한 지혜를 얻는 기회를 삼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코울터의 이 책은 중앙대 법정대학의 이상돈 교수와 전문번역가 최일성 씨가 <반역>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여 2008년 출판(출판사: 경덕출판사), 시판(市販) 중에 있다. 이 발췌문은 번역, 출판된 <반역>에서 발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