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92년 10월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은 '조선 노동당 사건'의 핵심인물 이선실. 당시 당서열 22위의 거물간첩이었다. [사진: 조선닷컴 캡쳐]
    ▲ 1992년 10월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은 '조선 노동당 사건'의 핵심인물 이선실. 당시 당서열 22위의 거물간첩이었다. [사진: 조선닷컴 캡쳐]

    1992년 10월 한국 사회를 뒤집어 놓았던 ‘남조선 노동당 사건’의 주모자 이선실.
    간첩 사건 당시 북한 노동당 서열 22위였던 그는 300여 명을 포섭해 남파 간첩망을 만들었다.

    당시 안기부는 이 사건을 수사하며 62명을 구속했다.

    이선실은 북한으로 돌아간 뒤 공화국 2중 영웅, 국기훈장 1급,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이 같은 ‘전설적인 남파 간첩’이
    북한으로 돌아간 뒤 ‘반혁명분자’로 몰려 고문을 받다 사망했다고
    북한 전문매체 ‘NK지식인연대’는 북한 소식통을 인용해 전했다.

    ‘NK지식인연대’에 따르면,
    이선실은 1992년 북한으로 돌아간 뒤
    통일전선부 산하 대남연락소에서 남파 간첩들을 교육했다고 한다.

    이후 이선실은 건강 문제, 상부와의 갈등 등을 이유로 남파간첩 교육 보직을 그만두고,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와 함께 경공업 부문 관리자로 일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선실은 북한 내부에서 ‘개혁파’에 가까운 성향이어서
    경공업 및 경제 분야 발전을 위해서는 외국자본을 유치하고 개혁개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
    김경희와의 사이가 껄끄러웠다고 한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한 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고,
    이어 김정일이 ‘개혁파’들을 무더기로 해임·숙청하자
    이선실은 정계에서 은퇴했다고 한다.

    이선실은 북한 내 개혁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김달현 총리와 매우 가까웠고,
    그가 흥남비료공장으로 좌천됐을 때도 자주 찾아갔다고 한다.

    ‘NK지식인연대’는
    “일각에서는 김달현의 사망일자가 2000년 8월이고,
    이선실도 같은 달에 죽었다면서,
    이들의 죽음을 억지로 연관시키려는 시도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면서
    “하지만 이선실은 알려진 것과 달리 2000년 8월 사망한 게 아니다”라고 밝혔다.

    ‘NK지식인연대’에 따르면 이선실은 1999년 말에 사망했다고 한다.
    이유는 ‘심화조 사건’ 때문이었다.

    ‘심화조 사건’은 일명 ‘용성 간첩사건’으로도 불리는 대규모 숙청 사건으로,
    1990년대 말 ‘고난의 행군’으로 김정일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 커지자,
    “남조선 간첩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2만여 명을 무차별 숙청했던 사건이다. 

    하지만 이후 ‘심화조 사건’의 핵심이었던 사회안전성 정치국장 채문덕이
    체포돼 처형당하면서 사태는 어느 정도 수습되었다고 한다.

    이선실은 1999년 ‘심화조 사건’ 당시 ‘안기부의 간첩’이라는 혐의로 체포돼
    “미제의 간첩으로 남한에 있는 지하혁명조직들을 모두 파괴하고
    우리 공화국(북한)을 내부로부터 와해시키기 위한 임무를 받고 침투된 자”로
    지목됐다고 한다.

    ‘NK지식인연대’는
    “(이선실에 대한) 사형기록은 없으며 고문으로 인한 사망으로 판단된다”고 전했다.

    또한 이선실을 사망케 한 채문덕을 처형한 뒤 김정일 정권은
    2000년 11월 ‘민족반역자 채문덕 놈의 죄행’이라는 해설자료를 통해
    보위부 간부와 각 시, 군, 당 보위부 부장급들에게 회람하도록 했다고 한다.

    아직도 각 도 보위부 사무실에 보관되어 있다는 이 해설자료는 모두 4페이지로,
    3페이지 중간 아래쪽에 서윤석에 대한 고문, 문성술에 대한 모략,
    이선실의 죽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고 한다.

    이 자료에는
    “심지어 수 없이 적후를 드나들면서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맡겨진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 낸 혁명동지까지
    고문으로 사망케 하는 만행을 서슴치 않았다”는 대목이 나오는 데
    이것이 이선실에 대한 설명이라는 게 ‘NK지식인연대’의 주장이다.

    김정일은 ‘심화조 사건’ 때문에 이선실이 채문덕의 고문을 받다 사망하자,
    그를 ‘혁명열사릉’에 안장하라고 지시하는 등 예우를 갖추었다고 한다.
    현재 ‘혁명열사릉’의 이선실 묘지에 있는 안장일자는
    김정일이 지시한 날짜라는 게 ‘NK지식인연대’의 설명이다.